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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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단상
청람 김왕식
가끔 만년필을 든다.
습관이라기보다 마음의 결을 고르는 일에 가깝다.
손에 쥐는 순간,
시간의 속도가 먼저 낮아진다.
하루의 급한 물살이
잠시 숨을 고르고,
손끝은 생각보다 먼저 조심스러워진다.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며 나오게 해야 하는 도구,
만년필은 언제나 나보다 한 박자 느리다.
하여, 나는 시집을 건넬 때
간혹
만년필을 찾는다.
책 한 권은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마음의 결을 건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위에 얹히는 몇 줄의 문장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마음이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 내려가야 한다.
펜촉이 백지 위를 밀고 갈 때
들려오는 바삭한 소리,
그것은 단순한 마찰이 아니라
마음이 종이에 닿는
작은 울림이다.
말로 다 풀어내지 못한 생각들이
얇은 금속 끝을 지나
잉크로 번져 나오는 순간,
가슴 어딘가에
미세한 파문 하나가 일어난다.
그 소리는 크지 않다.
오래 남는다.
만년필은 늘 불편한 도구다.
조금만 서두르면 번지고,
조금만 힘을 주면 흐름이 끊긴다.
종이에 따라 성질을 바꾸고,
손의 온도에 따라
숨결을 달리한다.
그 불편함이
외려
나를 붙든다.
조심스러운 손길,
느린 호흡,
한 문장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마음.
만년필로 쓴 글에는
속도가 아니라 태도가 남는다.
요즘의 문장은 빠르게 태어나
빠르게 사라진다.
만년필로 쓴 문장은
지워지기 전에
이미 마음에 먼저 새겨진다.
나는 가끔 시 몇 줄을
만년필로 적는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한 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서다.
잉크는 종이에 남지만
그 이전에
마음속에서 먼저 번진다.
그래서 만년필은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다.
말을 아끼고,
생각을 오래 붙들고,
문장을 쉽게 넘기지 않으려는
느린 결의 방식이다.
문득 떠오른다.
나는 겨우 시 몇 줄을
만년필로 적으며
숨을 고르는데,
최인호 작가는
장편소설 한 권을
이 느린 도구로 끝까지 써 내려갔다 한다.
그 문장들은
얼마나 많은 숨을 건너왔을까.
얼마나 많은 밤을 통과했을까.
생각하면
펜촉 하나에도
사람의 시간이 고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며칠 전 잉크를 채워 넣었는데
오늘 보니 또 희미해진다.
잉크는 줄어들고
문장은 남는다.
다시 채워야겠다.
잉크를 채운다는 것은
단지 글을 이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의 마른 시간을
다시 적셔 넣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만년필을 든다.
한 문장을 위해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그 문장이
조금 더 나를 닮을 때까지
천천히
번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