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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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와 모범생 사이에서 길을 잃다
청람 김왕식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그때 이미 절반쯤은 결정된다는 말을 뒤늦게 믿게 되었지만, 정작 그 시절의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집 안의 공기와 교실의 공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누대로 농사짓던 집안에서 자란 탓에, 집안 어른들의 소망은 단순하고도 분명했다. “펜대 굴리는 직업을 가져라.” 그것이 곧 판사나 검사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 흙 묻은 손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자식만큼은 깨끗한 책상 앞에 앉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문제는 내 마음이 그 길과는 어딘가 비껴서 있었다는 데 있었다.
당시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분은 수업 시간마다 문장을 이야기했고,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했으며, 글을 쓴다는 것이 곧 삶을 살아내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가르쳤다. 그 수업을 듣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세상이 조금 더 또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국문과를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생겼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몇 분 시인은 외려 선생님들께서 국문과를 권했음에도 부모의 뜻을 따라 법대에 진학해 판검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부모 말을 잘 들은 학생이고, 선생님 말은 듣지 않은 학생이다.
반면, 나는 부모 말을 듣지 않고 선생님 말을 들은 학생이다.
이쯤 되면 묘한 역설이 생긴다. 그들은 효자이면서도 불량학생이고, 나는 불효자이면서도 모범학생이다. 이 얼마나 균형 잡힌 세상인가. 세상은 언제나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누군가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승의 뜻을 따르며, 누군가는 스승의 기대를 접고 부모의 뜻을 따른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은 진행된다.
문제는 그다음에 생겼다. 국어 선생님은 늘 강조하셨다. “글을 잘 쓰려면 헤밍웨이처럼 써라. 짧고, 단단하게, 군더더기 없이.” 그 말은 내게 하나의 계율처럼 남았다. 나는 문장을 줄이고 또 줄였다. 꾸밈을 덜어내고, 설명을 생략하고, 가능한 한 간결하게 쓰려 애썼다.
세상은 나의 그 노력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글을 보고 “문장이 아직 미숙하다”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간결하게 쓴 것인데, 어째서 미숙하다고 하는가.’ 헤밍웨이를 따라가려다 보니, 어느 순간 헤밍웨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사 알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되, 그 뜻까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라는 것을.
간결함은 문장을 줄이는 기술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본질을 남기는 힘인데, 나는 그저 문장을 짧게 만드는 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나는 부모 말도 완전히 따르지 못하고, 선생님 말씀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한, 양쪽 모두에서 어정쩡한 학생이 되고 만다.
해서
요즘은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효자도 아니고 불효자도 아니며, 모범학생도 아니고 불량학생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시절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부모의 뜻과 스승의 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틈에서 나는 나 자신의 방향을 조금씩 만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문장을 다듬는다. 여전히 길게 쓰다가도 줄이고, 줄이다가도 다시 길게 쓴다.
아마도 나는 평생 헤밍웨이를 완전히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시절 국어 선생님의 말은 아직도 내 안에서 살아 있고, 부모님의 바람 역시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어딘가 조금 모자란 문장을 쓰며,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