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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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청람
존재의 여백에서
하루가 저물어 간다.
시계는 밤 9시를 가리킨다.
빛은 이미 물러났고, 사물들은 윤곽만 남긴 채 조용히 자신을 접는다.
이 시간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외부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지 않는다. 외려 자신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득 하나의 질문과 마주한다.
오늘, 나는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사실 행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흔적이 희미해졌다는 감각이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자신을 남기지 못했다는 공허에 가깝다.
하여, 이 문장은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변한다. 나는 오늘, 과연 살아 있었는가.
시간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다. 세 시간이 남았다. 이 세 시간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간이다. 그것은 빈 그릇처럼 열려 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로도 이미 완전한 상태에 있다. 시간은 채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는 장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흔히 시간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조차 사실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다만 그것이 의식되지 않을 때, 공허로 느껴질 뿐이다.
밤 9시는 그 공허가 가장 또렷해지는 지점이다. 낮의 소음이 사라지고, 타인의 시선이 희미해지며, 자신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걷혀 나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나’라는 감각이다. 그 감각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사실 무엇으로 존재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이 시간 속에 있을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존재는 행동으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조용히 머무는 순간, 더 깊이 드러나기도 한다.
세 시간은 짧다.
그러나 존재를 인식하기에는 충분하다. 단 한 줄의 글을 써도 좋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의식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의식된 시간은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빛을 품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하루는,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하루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하루는 이미 달라진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존재는 변하기 때문이다.
밤은 끝이 아니다. 밤은 드러남의 방식이 달라지는 시간이다. 낮에는 사물들이 빛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면, 밤에는 존재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춘다. 그래서 이 시간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 가까운 시간이다.
남은 세 시간은 채워야 할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머물러야 할 시간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깨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이 시간을 지나면, 하루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로 남는다.
그 결 위에, 다시 내일이 얹힌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