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아래, 한 생의 우정이 피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경복고 전경











목련 아래, 한 생의 우정이 피다
ㅡ목련꽃그늘 아래서 베르텔의 편질 읽노라



청람 김왕식





우정이란 같은 길을 걷는 데서 비롯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길을 끝까지 걸어낸 뒤, 다시 같은 풍경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깊이를 드러낸다. 이상엽과 나, 우리는 그러한 시간을 지나 다시 만난 사람들이다.

1975년 봄, 경복고 교정. 오른쪽 가슴에 ‘福’ 자가 새겨진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교내에 우뚝 서 있던 목련나무와 그 위에 가득 매달린 꽃들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와 기품의 목련이었다. 그날의 장면은 한 소년의 감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첫 기억으로 남았다.
그 기억은 이상엽의 내면에 조용히 자리 잡아, 삶의 바깥에서는 의사의 길을 걷게 하면서도, 삶의 안쪽에서는 끝내 문학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이 되었다.







목련꽃

이상엽



51년 전
75년도 경복고 1학년
오른쪽에 福자 새겨진 교복 입고
등교할 때

교내 아름들이 목련 나무에 달린
한 번도 그리 큰 목련꽃 무리를
본 적이 없던 기억

이후로 목련을 제일 좋아하는 꽃으로
기억에 새겨졌었습니다

그때도 컸는데 지금은 얼마나 클지
가끔 모교를 가면

목련 나무 잘 있나
들러봅니다



같은 시절을 출발점으로 삼았으나,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의과대학으로 나아가 인간의 몸을 다루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국문과로 진학하여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하나는 육신을 다루고, 하나는 말을 다루는 길이었다. 그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모두 인간을 향한 길이었고, 삶을 이해하려는 방식이었다.

세월은 각자의 자리를 깊게 만들었고, 우리는 서로의 삶을 건너온 뒤에야 다시 마주 앉게 되었다.

삶, 늦으막

해후였다.
그 만남은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어떤 결이, 다시 이어 붙여지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경복교 꾀꼬리동산. 그곳에 여전히 서 있는 목련, 나무는 더 자라 있었고, 가지는 더 넓게 퍼져 있었으며, 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 피어 있다.

그는 병원에서, 나는 교단에 서 있다. 서로 다른 위치였으나 시선은 하나였다. 같은 방향, 같은 꽃을 향하고 있다.


그 순간, 오십 년의 시간은 더 이상 단절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삶이 하나의 기억으로 이어지는 자리다.
우리는 당시 중간고사 음악 실기시험 노래였던 ‘사월의 노래’를 낮게 읊조린다.

“목련꽃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그 문장은 더 이상 젊은 날의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생을 지나온 이들이, 다시 같은 계절 앞에서 확인하는 삶의 문장이다.

우정은 함께한 시간의 길이로 증명되지 않는다. 외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낸 뒤에도,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가로 드러난다.

이상엽과 나, 우리는 그 사실을 목련 아래에서 다시 확인한다.
그는 여전히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의사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여전히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 모든 역할을 넘어, 우리는 같은 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그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현재의 한 부분이다.

목련은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고 지지만, 그 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해마다 더 깊어진다. 그 깊이는 세월이 쌓아 올린 것이며, 동시에 서로를 향한 신뢰가 만든 것이다.

우정이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합치다. 다른 길을 걸었음에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깊이다.

목련 아래에서, 우리는 그 우정의 의미를 다시 배운다.


ㅡ청람







친구 청람에게



경복고
중학교 때 가고 싶었던 학교
다른 학교는 거의 옮겨갔지만
지금도 그대로 있어
가끔씩 들르면
옛날 기억이 솟아나네

수업받던 건물들
꾀꼬리 동산
체육관, 노는 시간에 달려가서
50원 찐 라면 먹던 식당
돌계단이 있는 운동장
도서관과 실외 수영장 있던 자리에
들어선 건물
입구는 예전 그대로의 福자 새겨진
정문

그곳에서 같이 3년 지낸 친구
거의 50년 후
다시 만난 친구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은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글세상에서
서로를 보듬는 친구

큰 걱정 내려놓고
사랑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같이 인생 공부하면서
천천히 더불어 살아가세나

ㅡ 이상엽






그 자리에 남은 것들에 대하여
— 이상엽 시인께






시간은 모든 것을 데려가는 듯 보이나
어떤 것들은 끝내 남겨 두는 법이다


경복의 교정,
그 돌계단 위에 얹힌 햇빛과
꾀꼬리동산을 스치던 바람의 결,


이름 없이 흘려보냈던
소년의 하루들까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형태로
우리 안에 옮겨 앉아 있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오십 원의 온기로 끓던 라면 한 그릇도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나누던
작은 의식이었고


달려가던 발걸음은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함께 있음으로 완성된
하나의 생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 위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왔으나
결국 한 자리로 돌아오는 데
반세기가 걸렸을 뿐이다


이제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묻지 않으려 한다


어떻게 살아냈는가를
서로의 눈으로 확인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래된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고


자유는
무엇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머물 수 있는 용기임을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서두르지 말고
남겨진 계절을 천천히 건너가세


말이 다 닿지 못한 자리까지도
서로의 침묵으로 이해하며
그 시절의 교정처럼


한 줄의 길을
나란히,

걸어가세


— 청람 김왕식







글쓰기 첫돌



이상엽



1년 전 어느 날
양양 해안가에서
바다를 찍다가
처음으로 사진을 올리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청람 김왕식 선생의 도움으로
난생처음 글쓰기 시작
고등학교 때는 알지 못하였던
친구이지만
늦게 인연되어 난생처음의 신세계를 맞보게 해 준
김왕식 선생에게
감사드립니다

1년의 시절은 내게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청람 문학회 여러 교우님들의 멋진 작품들을
접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깊은 사유를 하는 계기와
여러 분야의 독서 기회도
생긴 것이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1년 동안 써온 글들을 보면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거칠고 미숙하지만
나름 꾸밈없는 생각 옮김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해 봅니다

사랑을 배우려고 태어난
자유 의지로 내면의 신의 모습을
느끼고 신神쪽으로 점점 다가서는 노력을
열심히 하는 생生이 되기를
스스로 다짐합니다

건강과 평온을 기도합니다



ㅡ 상엽






한 걸음을 고치는 손에게
— 이상엽 박사께



청람 김왕식




바다 한 장면에서 시작된 글이
이렇게 한 사람의 내면을 밝혀
새로운 길을 열어 갈 줄
그날의 파도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양양의 바람은 스쳐 지나갔으나
그날의 첫 문장은
지금도 당신 안에서
멈추지 않는 숨으로 남아 있다


몸의 무릎을 세우는 일로
수많은 삶을 다시 걷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뒤로 미루어 두었을 그 시간들


그 고요한 자리에
이제는 한 줄의 문장이 들어와
당신의 또 다른 생을
조금씩 일으켜 세우고 있다


수술대 위에서
뼈와 인대를 바로잡던 명의의 손길이
이제는 생각과 마음의 결을
조심스럽게 이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서툼이라 말하지 말라
처음의 거침은
살아 있음이 가장 또렷한 흔적이며
꾸밈없음은
이미 충분히 깊은 진실이다


우리는
같은 교정을 지나온 사람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나
당신은 사람의 걸음을 고쳤고
나는 사람의 말을 다듬었다


그 끝에서
다시 만나 보니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은
결국 한 가지였다


사람을 향한 마음
그 마음이
이제 글이라는 또 하나의 길을 만나
당신 안에서 다시 자라고 있으니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사랑을 배우려는 다짐은
어떤 이론보다 깊고
자유를 향한 의지는
어떤 성취보다 멀리 간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지금의 걸음으로 충분히 걸어가시라


무릎을 세워 주던 그 손으로
이제는 자신의 내면을
한 줄씩 일으켜 세우며


한 생이
점점 더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길을
함께 걸어가세


건강과 평온이
당신의 하루를 단단히 받치기를
오래된 벗의 마음으로
이 글을 놓는다



—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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