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엽 시인의 시 《의사 1 》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의사 1

시인 이상엽


나는 의사다
그냥, 평생 의사다

다섯 살 어느 날
아버지의 물음이
내 삶에 먼저 앉았다

커서 뭐가 될래

대답이 없던 자리 위에
아버지는 한 직업을 얹어 주었다

의사 될 거지

다시 묻고
다시 답하게 하고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던 손길

그 손길 아래
하나의 길이 자라났다

그렇게
나는 의사를 꿈꾸었고
결국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어
나는 한 문장을 물려받았다

"의사는 환자 얼굴 보고
돈이 머리에 떠올려지면
나쁜 의사데이
오직 가족처럼 대하레이"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하게 건네진 그 말은
내 안에서 오래 깎이며
하나의 등뼈가 되었다

나는
돈을 잘 버는 의사는 아니다

대신
아픈 이의 시간을 조금 덜 아프게 하고
굳은 몸을 조금 더 편하게 풀어주는
그 일에 머물고 싶다

수술이 가능한 자리에서도
칼보다
움직임을 먼저 권한다

몸은 스스로를 고치는 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언젠가는 이 길을 내려놓게 되리라는 것을

내 뜻보다
더 깊은 흐름이
나를 다른 자리로 옮겨 놓을 것이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길을 넘어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걸어갔듯이

그날이 오면
나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사람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의사라는 이름을 벗고도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살리는 말 한 문장
— 의술의 뿌리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의 직업을 말하는 데서 시작되지만, 끝내 한 인간의 뿌리를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의사’는 단순한 직업명이 아니다. 그것은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삶의 방향이며, 오래 견디며 굳어진 윤리의 형상이다.

“나는 의사다 / 그냥, 평생 의사다”라는 첫 선언은 담담하다. 그러나 이 담담함은 가벼움이 아니다. 선택의 흔적을 지우고 남은 필연의 어조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물음과 반복되는 응답 속에서 ‘의사’라는 말은 꿈이 아니라 먼저 주어진 자리로 자리 잡는다. 이때 의사는 미래의 직업이 아니라, 이미 삶 안에 심어진 씨앗이다.
이 시의 중심은 단연 아버지의 말에 있다.

“환자 얼굴 보고 돈이 머리에 떠올려지면 나쁜 의사데이, 오직 가족처럼 대하레이.”

이 경상도 사투리는 단순한 충고가 아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 그러나 바로 그 거칠음 속에 더 깊은 진실이 놓여 있다.
‘~데이’, ‘~하레이’라는 투박한 어미는 꾸밈없는 삶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 말은 훈계가 아니라 몸으로 전해지는 삶의 규율이 된다. 이 문장은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평생을 따라다니며, 선택의 순간마다 조용히 기준이 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말이 ‘지식’이 아니라 ‘등뼈’로 자리 잡는 과정이다. 시인은 그것을 외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며 깎아 자기 안에 세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의술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로 드러난다. 환자를 대하는 순간, 돈보다 먼저 얼굴을 보는 일. 그 단순한 순서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한다.

“돈을 버는 것에는 재능이 없다”는 고백 또한 깊다. 이는 능력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우선에 두는가에 대한 분명한 선택이다.
이 시인은 ‘잘 버는 의사’가 아니라 ‘잘 곁에 서는 의사’로 남는다. “아픈 이의 시간을 덜 아프게 한다”는 표현은 치료의 본질을 정확히 짚는다.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을 함께 건너는 일. 그곳에 이 시의 온도가 있다.

또한 수술보다 운동을 권하는 태도는 상징적이다. 칼을 드는 대신 몸의 기억을 깨우는 일. 이는 외부에서 고치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에서 회복하게 하는 길이다. 의사는 개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으로 자리한다. 이 점에서 그의 의술은 ‘행위’가 아니라 ‘방향’이다.

후반부에서 시는 다시 넓어진다. 의사의 길을 내려놓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더 큰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자세는 이 시를 직업의 고백에서 존재의 고백으로 확장시킨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떠올리는 대목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한 이름을 넘어 또 다른 사명으로 나아가는 삶의 가능성,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다.

이 작품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단 하나를 끝까지 지킨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지식이나 기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그 시작은 언제나
투박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한 문장의 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ㅡ 청람




□ 이상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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