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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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남의 궤적과 남겨짐의 윤리
— 조세희와 김광섭, 두 텍스트의 교차 읽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서론
문학은 언제나 중심을 향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 말해지지 못한 틈, 기록되지 않은 생의 주변부를 통해 시대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는 문학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인식의 장치로 기능함을 의미한다. 특히 근대화와 산업화의 급격한 변동 속에서 문학은 중심의 서사가 아닌 주변의 서사를 통해 사회의 균열을 증언해 왔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텍스트다. 전자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인간 소외와 구조적 폭력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며, 후자는 도시 문명의 확장 속에서 배제되는 생명의 존재 방식을 시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두 텍스트는 장르적으로는 소설과 시라는 차이를 지니지만, 그 내적 구조와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이 공유하는 핵심 개념은 ‘밀려남’이다. 여기서 밀려남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나 환경 변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특정 존재들이 중심에서 배제되고,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마저 축소되는 과정이다. 조세희의 소설에서 난쟁이 가족은 개발 논리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위협받는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산업화가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의 결과다. 인간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크기 자체가 축소된다.
김광섭의 시에서 비둘기는 이러한 구조적 배제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도시의 확장은 인간 중심의 질서를 강화하는 동시에, 인간 이외의 생명들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비둘기는 더 이상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로 전락한다. 이때 비둘기의 비상은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머물 수 없는 현실에서 비롯된 강제적 이동의 결과다. 이는 인간 중심적 문명이 어떻게 타자를 배제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두 텍스트는 서로 다른 대상과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심과 주변’, ‘포함과 배제’라는 동일한 구조적 문제를 공유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밀려난 존재들을 단순히 피해자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존재 방식을 통해 인간 사회의 윤리적 한계를 드러낸다. 즉, 밀려남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내포한 본질적 문제의 표지로 기능한다.
따라서 이 글은 두 텍스트를 교차적으로 읽음으로써, 산업화와 도시화가 만들어낸 배제의 메커니즘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존재의 변형 양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문학이 어떻게 밀려난 존재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동시에 독자에게 새로운 윤리적 인식을 요구하는지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Ⅱ. 본론
1. 축소된 인간과 쫓겨난 생명
조세희의 소설에서 ‘난쟁이’라는 명명은 단순한 신체적 특징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산업화의 구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축소되는가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다. 이 축소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즉, 인간은 점차 사회적 기능과 효율성의 단위로 환원되며, 그 과정에서 개별적 삶의 고유성은 삭제된다. 난쟁이 가족이 겪는 철거와 이주는 이러한 축소의 구체적 양상이다. 그들에게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삶의 기억과 관계가 축적된 장소다. 그러나 개발 논리는 이러한 장소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교환 가치와 효율성만이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며, 그 결과 인간의 삶은 수치로 환산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축소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일 뿐만 아니라, 점차 내면화된다는 점이다. 난쟁이라는 호명은 사회가 부여한 낙인이지만, 동시에 그 존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는 구조적 폭력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까지 개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난쟁이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변형된 존재 방식 자체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더 이상 온전한 주체로서 기능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축소된 위치에서 세계를 경험한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비둘기는 이러한 축소와는 다른 방식의 배제를 보여준다. 여기서 비둘기는 인간 사회 내부에서 축소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질서 바깥으로 밀려나는 존재다. 도시의 확장은 단순히 공간의 확장이 아니라, 질서의 재편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중심을 점유하고, 그 외의 생명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비둘기는 더 이상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로 간주된다. 그 결과 비둘기의 비상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머물 수 없는 조건에서 비롯된 필연적 이동이 된다.
이러한 비상은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운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된 이동이다. 이는 근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역설적 상황을 드러낸다. 공간은 확장되지만,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존재의 범위는 오히려 축소된다. 비둘기의 비상은 바로 이러한 모순의 시각적 표상이다. 더 이상 땅 위에 설 자리가 없는 존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은 위쪽이며, 그 위조차도 안정된 공간이 아니다. 따라서 비둘기의 비상은 해방이 아니라 유예된 상태, 즉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난쟁이와 비둘기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배제의 구조를 보여주지만, 그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난쟁이는 인간 내부에서의 축소를, 비둘기는 인간 외부로의 배제를 통해 동일한 질서를 증언한다. 이는 근대 사회가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중심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설정하고, 그 경계 밖으로 특정 존재들을 밀어낸다. 이 과정에서 밀려난 존재들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서 배제되는 것을 넘어, 의미와 가치의 영역에서도 소외된다.
결국 두 텍스트는 하나의 공통된 문제의식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누가 중심에 머무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동시에 ‘어떤 존재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가’라는 문제다. 난쟁이와 비둘기는 이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두 개의 표상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동일한 현실을 증언하며, 독자로 그 구조적 조건을 다시 인식하도록 만든다.
2. 상실의 양상과 침묵의 깊이
두 작품에서 상실은 결코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폭발이 아니라 침잠에 가깝고, 외침이 아니라 점차 사라지는 기척에 가깝다. 조세희의 소설에서 난쟁이 가족이 겪는 붕괴는 격렬한 저항이나 직접적인 항의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점점 말이 줄어들고, 표정이 사라지며, 삶의 자리에서 조용히 밀려난다. 이 침묵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 현실, 즉 발화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억압된 상태를 드러낸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무력감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봉쇄된 존재의 조건이다.
이러한 침묵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다. 난쟁이 가족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이미 정해진 질서 속으로 편입되거나 밀려난다. 그들의 상실은 사건으로 기록되기보다, 일상 속에 흡수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 철거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이후의 삶은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처럼 상실은 단절이 아니라 지속이며, 드러남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발견된다. 비둘기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시 속에서 그것은 항의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다. 다만 날아오를 뿐이다. 그러나 이 비상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이미 복합적인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 쫓겨남, 머물 수 없음, 돌아갈 곳의 부재. 이 모든 것이 침묵 속에 겹겹이 쌓여 있다. 비둘기의 비상은 말 없는 서술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침묵이 결코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침묵은 과잉의 상태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응축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 자체로 강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비둘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그 비상은 더욱 선명하게 읽힌다. 난쟁이 가족이 외치지 않기에, 그들의 붕괴는 더욱 깊게 인식된다. 이처럼 두 작품은 말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 침묵은 상실의 속도를 조절한다. 상실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난쟁이 가족의 삶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이 결국 붕괴로 이어진다. 비둘기 역시 어느 순간 अचानक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러한 점에서 상실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며, 그 과정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두 작품은 ‘상실의 방식’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상실은 단순히 무엇을 잃는 문제가 아니라, 말할 수 없게 되는 상태로의 전환이며,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 조건으로의 이동이다. 이때 문학은 그 침묵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끝까지 붙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이 두 텍스트가 공유하는 미학적이며 윤리적인 태도다.
3. 위로의 방향과 남겨진 의지
두 작품은 절망을 그리면서도 그 자리에 멈추지 않는다. 무너짐의 끝에서조차 남아 있는 어떤 움직임, 곧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의 태도를 조용히 드러낸다. 조세희의 작품에서 ‘작은 공’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던져지지만, 그 행위 자체로 이미 하나의 뜻이 된다. 이 뜻은 현실을 이겨내겠다는 장담이 아니라, 아무리 힘겨운 조건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마지막 결의다.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던지는 몸짓,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깊이가 드러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움직임이 크지 않다는 데 있다. 작은 공은 거창한 저항이 아니라, 아주 미약한 흔들림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음이 이 장면을 더 크게 만든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끝내 붙들고 있는 힘이다. 작은 공은 날아오르는 동안, 그 자체로 인간이 끝까지 놓지 않는 어떤 빛이 된다.
김광섭의 시에서 비둘기 또한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비둘기는 쫓겨난 존재이며, 더 이상 머물 자리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이 비상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조차, 끝내 존재를 이어가려는 조용한 의지다. 비둘기의 날갯짓은 크지 않지만, 그 안에는 멈추지 않으려는 힘이 담겨 있다.
이 지점에서 두 작품은 하나로 이어진다.
하나는 공을 던지고, 하나는 하늘로 오른다.
둘 다 위를 향하지만, 그 위는 편안한 곳이 아니다. 머물 수 없는 자리이며, 오래 견딜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를 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의 의미를 만든다. 그것은 결과를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움직임은 보는 이에게 조용한 울림을 남긴다. 작은 공의 궤적과 비둘기의 비상은 직접적으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그 장면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묻게 한다. 무엇이 끝내 남는가, 무엇이 사라지지 않는가. 그 질문 속에서 비로소 위로는 만들어진다.
두 작품은 희망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자리에서, 끝까지 꺼지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태도는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
사라지지 않으려는 의지.
그것이 이 두 작품이 끝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위로다.
Ⅲ. 결론
조세희와 김광섭의 작품은 서로 다른 형식과 표현을 지니고 있음에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는 무엇을 세우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밀어내고 있는가. 더 높이, 더 넓게 나아간다는 이름 아래 어떤 존재들이 그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가. 이 질문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조세희의 작품에서 난쟁이 가족은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밀려난 인간의 형상을 보여준다. 김광섭의 시에서 비둘기는 도시 문명의 확장 속에서 자리를 잃은 생명의 형상을 드러낸다. 하나는 인간 내부에서의 축소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외부로의 배제이지만, 두 경우 모두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이 희생되는 구조를 드러낸다. 이처럼 두 작품은 단순히 개별적인 비극을 서술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를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학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밀려난 존재들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게 한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궤적은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지만, 그 짧은 움직임은 오래 기억된다. 비둘기의 비행 또한 불안정하고 지속되지 못하지만, 그 흔들리는 선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처럼 두 작품은 길지 않은 순간 속에서 깊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궤적을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단순한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되묻게 된다. 우리는 밀려난 존재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밀어내는 구조 속에 함께 서 있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은 바로 이 불편함을 통해 독자를 새로운 인식의 자리로 이끈다.
또한 두 작품은 우리에게 ‘보는 방식’을 새롭게 요구한다. 눈에 잘 띄는 것, 중심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에 주목하도록 한다. 밀려난 존재들은 대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볼 때, 비로소 사회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 점에서 문학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 두 작품이 남기는 것은 하나의 태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끝까지 보려는 태도,
작은 움직임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려는 태도,
그리고 밀려난 자리에서조차 존재의 가치를 놓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 태도는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낮고 조용하다. 그러나 바로 그 낮음 속에서 문학은 가장 깊은 힘을 발휘한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중심과 주변, 드러남과 숨겨짐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 일, 그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따라서 조세희와 김광섭의 작품은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성찰하게 만드는 하나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지워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