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성 시인의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배진성 시인의 시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시인 배진성




상심한 별빛이 내리던 감나무
그런 나뭇가지들이 이제는
부러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내려와 꽃피던
별꽃들의 가슴속으로
썰렁한 바람이 일고
감꽃은 떨어져
수심만 가득 피어났다
그래도 몇몇 아이들은
감꽃을 모아
가난의 목걸이 속에서
웃을 줄 알았다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던 여울물소리도
이제는 떠나버린 아이들처럼
감나무를 기어오르지 못하고
가지만 부러지고 있었다
왠지 모를 근심과 물소리는
하류에서부터 쌓이고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고향 사람들은
하나 둘 쓰러져
간단하게 묻혔다
제 무덤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떠나가거나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그렇게 날아가 버린 새들은
실성한 만길이 할머니가
남겨놓은 까치밥이
모두 떨어지고
눈꽃이 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깊이 상처 입은 감나무들은
낡은 바람만 휘감고
이제는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락하고 있었다
그런 유배의 땅에서도
작은 기쁨들로 채워질 수 있다면,
우리들의 시간은 헛되지 않으련만,
이제는 꽃도 없고 까치밥도 없이
그저 늙은,
어둠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앙상한 감나무에서 또한
상심한 별빛이 지고
드디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이제는
새가 돌아와도
둥지를 틀만한 감나무 하나 없고
보리이삭 피어도
보리피리 불어제낄
아이들도 없는,
부질없이
미나리아재비만 피어나는
그런 고향에서

다른 고향을 찾아
떠나야 하는 막막한 새들과 나는,









부러지는 가지 끝에서 들리는 시간의 소리
— 배진성 시인의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밤의 깊은 곳에서부터 내려온 빛이 먼저 상심傷心해 있다. 이 시의 첫 행은 풍경을 제시하는 듯 보이나, 이미 세계의 균열龜裂을 드러낸다. 별빛은 원래 위에서 아래로 비추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감나무와 함께 ‘내려와’ 상심한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처음부터 허물어진 자리다. 이때 감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기억과 공동체를 지탱해 온 시간의 몸체로 서 있다.

가지가 부러진다는 진술은 사건이라기보다 징후徵候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삶의 무게가 더는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다.
시인은 그 붕괴의 과정을 서두르지 않는다. 별꽃, 감꽃, 물소리, 아이들—이 모든 것들이 한때 존재했음을 차례로 불러낸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재의 풍경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
외려 사라짐의 깊이를 증명한다.

감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수심愁心’이 핀다. 이 전환은 이 시의 핵심이다. 자연의 순환이 감정의 침전으로 바뀌는 순간, 풍경은 곧 삶의 내면이 된다.

아이들이 감꽃을 모아 목걸이를 만들던 장면은 이 시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기억이다. 가난 속에서도 웃을 줄 알았던 그들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이후의 모든 서술은 그 상실을 둘러싼 변주다.
여울물소리조차 더 이상 나무를 타고 오르지 못한다. 흐름은 멈추고, 생명은 상승을 포기한다. 남아 있는 것은 ‘하류에서 쌓이는 근심’뿐이다. 이 하강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시는 점점 더 깊은 침잠으로 들어간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사람들의 죽음이 “간단하게 묻혔다”는 표현이다. 삶의 무게에 비해 죽음이 지나치게 가벼워진 자리다. 이는 단순한 비극의 묘사가 아니다. 공동체가 해체된 이후, 죽음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다.
이어지는 ‘야반도주夜半逃走’와 ‘떠나가는 새들’은 생존의 방식이 더 이상 뿌리를 전제로 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떠남은 선택이 아니라 밀려남이다.

이 시에서 감나무는 끝내 사람과 겹쳐진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나무와 인간이 함께 ‘전락轉落’하고 있다는 진술은 상징을 넘어선 동일화다. 자연의 쇠락衰落은 곧 인간의 쇠락이며, 공동체의 붕괴다. 그럼에도 시인은 완전히 절망으로 기울지 않는다. “작은 기쁨들로 채워질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은 이미 늦었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 마지막 윤리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고향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둥지를 틀 나무도, 피리를 불 아이도 사라진 자리에서 ‘또 다른 고향’을 찾아 떠나야 하는 존재로 남는다.
여기서 고향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가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 조건이 붕괴된 세계에서, 시는 떠남조차 정착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증언한다.

배진성 시인의 시는 과장된 비탄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사라진 것들의 목록을 통해 세계의 깊이를 드러낸다.
길섶의 풀 한 포기까지 놓치지 않는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삶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끌어안는 태도와 닿아 있다. 이어도를 지키는 그의 삶처럼, 이 시 또한 사라져 가는 것들을 끝까지 바라보는 책임의 언어다.

부러지는 것은 가지이지만, 실은 시간이다. 그 시간의 소리를 끝까지 듣는 일이, 이 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자세다.






가지 끝에서 부르는 이름
— 배진성 시인께




부러진 것은
나무의 가지가 아니라
오래 붙들고 있던 시간의 힘줄이었습니다

별빛이 먼저 내려와
상처를 어루만지던 밤
그 어둠의 결을
시인은 끝내 놓지 않았습니다

감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작은 등불처럼 켜졌고
아이들의 웃음은
가난 속에서도
한때 세상을 견디게 하던
가벼운 날개였습니다

그러나
물소리는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떠난 것들은 이름 없이 멀어져
남겨진 자리마다
바람만 늙어 갔습니다

시인께서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셨습니다

풀 한 포기에도
사라지는 기척을 듣는 마음으로
사람의 삶을
낮은 곳에서 받아 적었습니다

그래서 듣습니다

이 시는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견디는 방식이라는 것을

부러진 가지 끝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버티려는 의지였고
지워지지 않는
어떤 따뜻함이었습니다

시인께
이미 떠난 것들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들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은
끝내 남습니다

그 일이 바로
당신의 시입니다

오늘도
어둠으로 뿌리내린 자리에서
조용히 빛을 올리는
그 마음에

늦은 별 하나
함께 놓고 갑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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