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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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어버린 구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낮의 태양이 땅을 짓누르듯 내려앉아 있다.
숨조차 뜨겁게 달궈지는 시간, 아이들은 맨발로 황톳길 위에 앉아 있다. 발바닥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다. 땀은 흙과 뒤섞여 몸 위에 얇은 막처럼 내려앉고, 얼굴에는 이유를 묻지 않는 웃음이 번진다.
아이들은 구슬을 굴린다.
손끝에서 튕겨 나간 작은 둥근 것들이 햇빛을 받아 번뜩인다. 그 빛은 유리의 것이라기보다, 땅속 깊은 시간의 응축처럼 묵직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누구에게는 어떤 욕망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인지. 그저 지금, 서로의 웃음을 향해 구르는 작은 세계일 뿐이다.
그때, 낯선 발자국이 다가온다.
먼 길을 건너온 이들의 눈은 먼저 빛을 알아본다. 아이들이 아닌, 구슬을 본다. 아니, 구슬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놀람이 번쩍이고, 곧 계산이 따라붙는다. 경이에서 탐욕으로 건너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아이들이 쥐고 있던 것은 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돌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 서로를 향해 던질 수 있는 것, 웃음을 만들어내는 매개일 뿐이었다. 그 단순함 앞에서, 외부의 시선은 복잡해진다.
몇 개의 사탕과 초콜릿.
달콤함은 혀끝에서 금세 사라지는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대가라 부른다. 아이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물음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가져왔느냐는 질문은,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대답으로 이어진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오래전부터 아무도 묻지 않았던 땅이 있다.
그 순간, 가치의 방향이 뒤집힌다.
아이들에게는 가벼웠던 것이 무겁게 변하고, 가볍게 주어진 것이 사실은 더 무거운 것을 빼앗기 위한 장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인식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여전히 놀고, 여전히 하루를 살아간다.
빼앗기는 것은 언제나 조용히 일어난다.
총성이 울리지 않아도, 피가 흐르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이 지나간 뒤다.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내어준 것들, 가치를 알지 못해 잃어버린 시간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한 가지
—힘의 비대칭.
여기서 문제는 단순한 약탈이 아니다.
무엇이 가치인가를 정하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다. 아이들은 빛을 놀이로 썼고, 외부의 사람들은 그것을 부로 바꾸었다. 같은 사물을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겹쳐진다. 그리고 더 강한 세계가 더 약한 세계를 밀어낸다.
끝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탕의 단맛은 사라지고, 다이아몬드는 다른 손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황톳길 위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웃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삶을 견디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웃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적어도 웃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비극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안에는 인간의 오래된 질문이 숨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리고 무엇을 잃으면서 그것을 얻었다고 말하는가.
다이아몬드는 빛난다.
그 빛은 언제나 누군가의 어둠을 통과해 온 것이다. 아이들의 손에서 굴러가던 그 작은 구슬이, 누군가의 금고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때, 세계는 한 번 더 조용히 기울어진다.
그 기울어짐을 바로잡는 일은
연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이 진짜 가치인지 다시 묻는 일,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쉽게 눈을 돌리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