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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아버지를 팔테니 10 만원에 사라!

가난한 부부는 정말 샀다.


이 세상에는

팔 물건이 많다.

사람도 사고팔 수 있다.


과거

노예제도가 그랬다.


그런데

현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병든 아버지를 판단다!






이보다

특이한 광고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팝니다"

라는 제목에 이어서는 노령의 아버지를 십만 원에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더욱 심하게 느껴진 건 부끄러움과 원통함이었다.

이 광고를 본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고를 읽으며


'세상 말세다'

라고

혀를 차거나,

또한

노령이며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누가 모시겠느냐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그 광고에 적힌 주소로 한 부부가 찾아갔다.

고요한 새벽,

한 초인종 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이어서 문이 열리며 늙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신문의 광고를 보고 온 부부의 말에

그는 미소를 띠며 맞아들인다.

그 집은 넓은 정원이 있는 대저택이었다.

이 부부는 다시 한번 광고를 보고 왔다고 말했다.


그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늙고 병든 양반을 왜 모시겠다고.."

하며 반문했다.

부부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로 살았던 그들,

그리움에 찬 부모님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아버지를 팔겠다'

는 광고는

부모님을 모시는 기회로 비쳤다.

그들의 솔직한 감정을 전하며,

돈을 건넸을 때,

할아버지는 무언의 미소를 띠며

일주일 후

다시 오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

그들이 다시 그 집을 찾았다.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던 할아버지는

농담처럼


"어서 오게나, 나의 아들과 며느리야"

라고 말했다.

그 할아버지의 광고는 젊은이들의 돈욕심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돈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이 사랑으로 가득 찬 부부에게는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그들은 소박하게 살고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었다.


광고 이야기를 보며

나는 온몸에 전율이 왔다.


할아버지가 세상에 경각심을 주는 일침의 광고도

그랬지만,

나를 더욱 아프게 한 것은

그 가난한 부부의 마음이다.


어떻게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부부는 둘 다

고아로 자랐으니

부모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생면부지의

'병든 노인을

모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접한 내용일 것이다.

나 역시

지인이

어제 보내온 글이다.



나에게는 이 글이

그 부부 이상으로 각별하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에

제대로 모실 기회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으니

기억도 없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듣기에


비가 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했다.


당신의 이름 석자를

불러보고 싶은

아침입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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