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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12. 2023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성은 감추려 했다

여성은 아름답다








가을의

길목이다.


메타쉐카이어

황톳길을 걷는다.

아직은 시린 맨발이다.


는개가

살포시 어깨에 내려앉는다.

가끔

동행하는 K 선생이

손바닥 크기의 접이 양산을 펼친다.

괜찮다는 내게

한사코 양산을 씌운다.


그의 입언저리가

달싹인다.

 입담의 길목에 들어섰음을

직감했다.


영락없는

과거사의 고백일레라.


숨을 몰아쉬는 품새가

오늘은

단단히 쏟아낼 모양이다.


떨어뜨린

두루마리 휴지처럼

또르르

그날의 목격담 풀린다.


내 한쪽 어깨는

한 뼘쯤

한데에 있다.


내 귀는

한 뼘씩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수십 년 전

일이다.


충무로 문턱에 위치한

대연각 호텔에서

불이 났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불길이

점점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시커먼 연기가

창가에서 푹푹 흘러

넘쳤다.

실신한 채로

소방대원에게 업혀 나온 사람,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


그러다

골절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현장은 아수라장,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불꽃에 그슬리고,

연기에 그을린 마지막 남은 사람 몇 명이

옥상으로

대피했다.

황천강에 빠진 사람들처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들을 지켜보는

시민들도 발을 동동거리며

가슴 졸였다.


그때!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헬기 몇 대가

나타났다.


시민들은

구조 모습을 바라봤다.

숨도 쉴 수 없었다.

목에 불덩이가 옮겨 붙기라도 한 냥

목이 뜨거웠다.


한 명 두 명

헬기에서 내려준

밧줄을 꽉 움켜잡

구출되었다.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이었다.

마지막

한 명만 남았다.
여성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모든 이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무사히

구조되길 간절히 바랐다.


여자가

밧줄에 올랐고

헬기가 솟아올랐다.


순간 여자의 치마가

훌러덩,

완전히 훌러덩 뒤집어져 펄럭였다.


속옷이 보였다.

분홍색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자는

다리를 꼬아

속옷을 감추려 안간힘 썼다.


그 순간,

생과 사의 경계는

속옷 한 장이 주는 여성성이었다.


같은 순간,

이 모습을 지켜보던

또 다른 여성은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아니,

괴로웠다.

자신의 볼품없는 하얀색

무명 속옷 때문에.
그 여성이

바로  

K선생 자신이었노라고.

그 길로

K 선생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남대문 시장에 들러

분홍색 포함

색색의 속옷 서너 장을 샀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속옷임에도

아름다운 분홍색

속옷을 입은 그 여자를 생각하며.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한 뼘 빠져나온 나는,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른다.

아,

여성성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한 여인은

속옷 노출을 부끄러워하고,

그걸 지켜본

또 다른 여인은 자신의 숨겨진 속옷을 부끄러워하고….


죽을 위기에 직면하면

삶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두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토록 부끄러웠던 이야기가  

K 선생의 입에서 용기라는 옷을 입고

나왔다.


부끄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라면

어디든 치맛자락 휘날리며

오늘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겠다.


K 선생의 레이스 곱게 달린

양산이

는개비에 젖어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이

한데

어깨를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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