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삶으로 가능성을 넓혀라.
언제가 방송에서 ‘세상에서 가장 험한 등굣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아이들 서너 명이 짝을 이루어 책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두 시간 남짓 아슬아슬한 산비탈을 서로 잡아주고 끌어주면서 험한 산을 넘어 학교에 가는 아찔한 장면이었다.
동남아시아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고 위험천만한 등굣길을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랍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지역 외딴섬에 사는 세 자매는 큰 섬에 있는 학교에 가려고 카누 같은 작은 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이글거리는 땡볕을 맞으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구멍 난 배 밑창에서 새어 나오는 물을 퍼내며 세 시간 남짓의 고된 여정 끝에 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아이들이 위험한 상황을 무릅쓰고도 학교에 가려고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그런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선생님과 함께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고 콧등이 찡해졌다.
그 아이들은 온갖 위험 속에도 오로지 배움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이 위험한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간절하듯이 배움을 통해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애나 어른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직장인들은 자기 계발이 한창이다.
직장에서 승진하기 위해서 또는 업무 역량을 넓히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거나 자격증 취득을 위해 퇴근 후에 학교나 학원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제주도에서 3년 남짓 근무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홍보업무를 다시 맡게 되었다.
그 당시 홍보업무는 주변으로부터 잘했다는 칭찬보다는 질책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직원들 대부분 홍보업무를 선호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홍보업무에 흥미를 느꼈다.
사보를 만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창의적인 생각으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삶에 생동감을 주는 것 같았다.
전국을 다니며 직장의 홍보 소재를 찾아 취재하여 사보에 글을 실었다.
이때의 경험이 대외홍보 업무를 맡았을 때 큰 밑천이 되었다.
언론사 기자들과 방송국 프로그램 담당자들에게 직장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알리는 좋은 아이템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생각대로만 잘되지 않아서 어쩌다가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고 직장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퍼져나갔다.
이를 만회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홍보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광고와 홍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인적 네트워크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직장에서 적성에 맞는 업무를 잘하려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저리 알아보고 지원한 대학원의 전형절차를 걸쳐서 최종 합격을 했을 때 느닷없이 감사실로 인사발령이 났다.
대략 난감한 상황에서 문득...
“감사실 업무와 관련이 없는 대학원 진학을 해야 하나 더욱이 적은 돈이 아닌 등록금을 내고 공부할 필요가 있나, 다시 홍보업무를 못 할 수도 있는데” 고민을 거듭하다가 대학원 등록을 감행했다.
어쨌든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고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직장에도 도움이 되고 나 자신의 업무영역을 단단히 다져 놓기로 했다.
이러한 맘으로 S대 언론대학원에 진학하여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주말에 1박 2일로 가졌다.
대학원 입학 동기 대부분은 방송, 광고, 홍보, 출판, 디지털미디어 등 관련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홍보전공자들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외국인 회사에서 홍보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돌아가면서 하던 자기소개에서 내 차례에 직장에서 입학 전에 감사실로 인사이동 했다고 소개했다.
한 입학 동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업무와 관련성이 없는데 학교에 다니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나는 홍보업무를 다시 할 수도 있다며 이 분야를 잘 배워서 직장에서 홍보전문가가 되려 한다고 그의 염려를 누그러뜨렸다.
감사실에서 처음에는 주로 검사기획 업무를 담당했던 터라 검사출장이 적었다.
다행히도 퇴근 후에 부지런히 학교를 향하면 강의시간에 맞추어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S대 대학원은 수업의 출결이나 시험 등 학사관리를 엄격하게 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체험해 보니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대학원 동기 여학생들은 나보다 다소 어렸지만 남학생들은 대체로 나와 비슷한 나이 언저리에 있었다.
이들은 각자의 직장에서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대학원의 문을 두드리고 배움을 통해 자기 계발을 체계적으로 실현해 나가기 위해 현실의 편안함을 잠시 뒤로 미룬 것 같았다.
나하고는 달리 이미 국내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서 광고나 홍보 분야의 업무를 하고 있으면서 이론과 실무를 접목해서 전문 능력을 갖추어 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광고와 홍보 분야가 외국의 학문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가끔 수업 시간에 외국인 회사의 마케팅 담당 임원을 초청해서 영어로 강의하는 경우가 있었다.
강의를 들으며 어떤 여학생이 강사에게 질문을 던지며 주고받는 대화 속에 때때로 웃음 짓는 동기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한 나는 두 시간 남짓한 강의시간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홍보 분야의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 전문지식을 배우고 실무에 적용하지만 나는 인사이동에 의해서 전혀 다른 분야의 업무를 하고 있다 보니 갈등도 생기게 되었다.
학사관리의 엄격함은 대학원에서 처음 치른 중간시험에서부터 매서움을 보여주었다.
나는 학기말 시험에 큰 부담을 안고 준비했는데 다행히도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교수님들의 강의로 광고와 홍보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기도 했지만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동기들이 근무하는 일터의 생생한 홍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홍보 분야의 실무를 그들의 경험을 듣고 간접 체험하기도 했다.
강의 있는 날은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구내 학생식당에서 2천 원짜리 설렁탕을 먹으며 가난했던 대학생 때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또한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뭔가 새로움을 얻어 간다는 생각으로 늦은 시간 신촌에서 인천까지의 먼 발걸음을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대학원 생활은 가끔은 강의가 끝난 후에 교수님과 동기들과 어울려서 학교 앞 생맥주 가게로 이어져 생생한 홍보 현장의 이야기꽃을 피우며 두 학기가 지났다.
그 사이에 직장에서는 총무팀을 거쳐서 다행히도 다시 홍보실로 전보 발령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그동안 몇 차례의 비서실 근무 제안을 대학원 학업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사팀에 이번에는 지방으로 인사발령이 날 수도 있다며 더 이상 대학원 학업을 이유 되지 말라며 강력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서울에서는 비서실만 빼고는 어느 부서에 있더라도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데 지방에서는 불가능했기에 비서실로 이동하면서 대학원을 휴학해야 했다.
처음에 대학원에서 겪은 학사관리의 쓰라린 경험을 만회하고자 악착같이 공부해서 성적 장학금도 받았는데 휴학하고 잠시 쉬려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직장이 우선이고 직장에서 전문적인 업무영역을 넓히려고 대학원을 진학했기 때문에 마냥 아쉬워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비서실 업무는 이른 아침부터 때로는 새벽까지 이어졌었다.
그렇지만 길지 않은 비서실 생활도 시간의 순리에 따라 견디며 지나다 보니 홍보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직장에서 자신의 업무와 역할에 따라 자기 계발의 방법이 다를 수 있겠지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일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다.
나의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 자기 계발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업무의 전문성을 높이고 좋은 결과에 대한 성취감도 느끼고 직장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와 직장 모두에게 이롭게 되는 것이 자기 계발의 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높여서 불확실한 미래를 스스로 헤쳐나가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이 되기도 한다.
나는 삼십여 년이 넘게 한 직장에 다니며 내 삶의 기반이 되어준 직장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과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추구하면서 직장의 일과 나의 삶을 더욱 성숙시키려 노력해 왔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이고 미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 또한 나의 몫이다.
동남아시아 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등굣길’을 지나 배움에 대한 열정과 행복한 모습처럼 나 역시 끊임없이 자기 계발의 의지를 견지하면서 순간순간의 참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