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1

by 삼류작자


병실은 어디에나 흰색이 과했다. 벽도, 시트도, 천장도, 커튼도 모두 같은 색이었다. 경계마저 흐릿했다. 시간조차 색을 잃고 박제된 공간 같았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단 하나, 규칙적으로 고막을 긁는 기계음뿐이었다.


삐… 삐… 삐…


침대 위에는 서른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이불 아래 묻힌 몸은 한 줌의 온기조차 지키지 못하는 듯 위태로웠다. 얇은 종이처럼 창백한 피부, 메마른 입술 위로 산소마스크가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는 찰나마다 마스크 안쪽이 희미하게 흐려졌다가 다시 투명해졌다. 그 미약한 반복만이 그녀가 아직 ‘이곳’에 속해 있다는 마지막 증거였다.


그때였다. 아주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깊은 수렁에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의식이 잠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힘겹게 들어 올려졌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찰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없는 병실의 흐릿한 흰색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현실을 지나 훨씬 멀고 오래된 기억의 심연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눅눅한 골목의 습기.

비린 바다 냄새가 섞인 밤공기.

흔들리던 배 위에서 마주했던 이름 없는 어둠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차가운 얼굴들….

기억들이 해류처럼 뒤엉켜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 같은 기억을 모두 훑고 난 뒤, 간신히 버티던 눈꺼풀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그녀의 세계가 다시 암전 된 순간— 아무도 없던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아… 하아….”


렌조였다.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침상 곁에 멈춰 섰다. 미친 듯이 찾아 헤매던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 바로 옆에 의자가 있었지만 그는 앉지 않았다.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자 감추듯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제야 거친 호흡을 다스리며 정지된 듯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셔츠 사이로 이즈레미 문신이 날카롭게 드러났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갈 곳 없는 초조함이 꿈틀거렸다.


삐… 삐…


기계음의 박자가 어긋났다. 순간 병실 안에 묘한 정적이 흐르자, 렌조의 시선이 불안하게 주변을 훑었다. 요동치는 심전도 모니터, 이불 밖으로 힘없이 빠져나온 그녀의 하얗고 마른 손. 그리고— 방금 흘러내린 듯 관자놀이를 타고 베갯잇을 적시고 있는 투명한 눈물 자국.

렌조는 그 흔적에 시선을 박은 채 굳어버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르며, 그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おい(어이).”


렌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더니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마치 기도라도 하듯 그녀 앞에 웅크린 자세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턱을 굳게 다문 채 그가 뱉어낸 말은 하나였다.


“死ぬな(죽지 마).”


애원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그렇게라도 붙잡지 않으면 그녀가 당장 저 흰색의 무(無) 속으로 흩어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의식은 이미 렌조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삐… 삐…


불안정한 파형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의료진이 들이닥쳤다. 짧은 말들이 오가고 급한 발소리가 뒤섞였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은 점점 멀어져 갔다. 마치 병실 한가운데에 투명하고 얇은 막이 내려온 것처럼.

그 막 너머에서, 그녀의 마지막 생각이 조용히 명멸했다.


‘……내 이름은 미유. 미즈하라 미유.’


잠깐의 공백. 그 이름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확신하듯 단 하나의 이름을 길어 올렸다.


‘아니… 이정숙이다.’


삐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모니터 속 녹색 선이 곧게 펴졌다. 비명 같은 소리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