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비는 정숙이 이 집으로 들어온 뒤 이틀이 지나도록 멈출 기미가 없었다.
잠시 소강상태처럼 잦아들었다가도
이내 다시 쏟아져 내리기를 반복했다.
처마를 두드리는 소리는 이제 배경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정숙에게 이 낯선 집은 어느새 이상할 만큼 안전한 공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게 공간의 구석구석을 파악하고 나면
그곳을 자기 자리처럼 받아들이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대문을 열고 나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쪽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렌조가 마련해 둔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비슷한 비닐봉지에 담긴 도시락들이 몇 개 더 들어 있었다.
그 외에는 술뿐이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숙은 사람이 산 흔적이 없던 집 안을 정리했다.
걸레를 적셔 바닥을 닦고 도시락을 꺼내 밥을 먹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집 안은 조금씩 사람 사는 모양을 갖춰갔다.
어쩌면 이렇게 열심히 집 안을 정리하다 보면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벌어진 일들 가운데도
그럴 법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밤이 되자 방 한쪽에 이불을 깔고 몸을 눕혔다.
어둠이 깊어질 즈음,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숙은 깨어 있었지만 꼼짝하지 않고 돌아누운 채 숨을 죽였다.
렌조가 방 문 앞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 미닫이 문이 열렸다.
방 안을 잠시 들여다보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발소리는 방을 벗어나 주방 쪽으로 멀어졌다.
잠시 뒤
달그락,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정숙은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들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이 자꾸만 어긋났다.
거실 쪽에서 술을 따르는 소리가 났다.
잔을 기울이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한참 동안 비가 처마를 때리는 소리와 술잔이 내려 놓이는 소리가 이상하게 섞였다.
정숙은 이불을 말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이 식어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미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몸이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렌조가 일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이어서, 욕실 쪽으로 향하는 그의 발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한동안 정막 속에서 빗소리만 하염없이 울렸다.
정숙은 눈을 꼭 감은 채
귀만 열어두고 있었다.
다시 욕실문이 열렸고 발소리는 다시 한번 방 문 앞에서 멈췄다.
이불을 틀어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이 들어갔다.
방문 앞.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렌조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밤의 약한 빛 속에서
젖은 머리칼,
다부진 어깨와 등,
허벅지까지 이어진 문신이 조용히 드러나 있었다.
렌조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누워있는 정숙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이불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