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얼마나 지났을까?
정숙은 욕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몸도, 생각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마치 순서를 기억해 낸 사람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 문을 잠그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긴장과 피로로 굳어 있던 근육들이 하나둘 풀려나갔다.
그 감각이 자신의 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물이 대신 느껴 주는 것인지 잠시 구분하지 못했다.
밖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마를 두드리는 소리만 낮게 이어졌고 그 외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 외에는 집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사실이 안전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인지 정숙은 굳이 따져 보지 않았다.
욕조 안에서 눈을 감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나중에야 알았다.
언제부터 식어버린 물이 피부에 닿아 있었는지 한기가 먼저 그녀를 깨웠다.
밖의 빗소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욕실 쪽창으로는 동이 텄는지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정숙은 욕실 문 앞에서 아주 오랜 시간 서 있었다.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그녀의 옷가방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든 채 조심조심 거실로 나오자 차부다이 위에 편의점 도시락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거실에서 마당 쪽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고 툇마루에 서자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처마 안쪽에는 누군가 젖지 않게 밀어 넣은 듯 그녀의 신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밤에는 어디로 들어왔는지,
어떤 건물 안에 들어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는데
이제 보니 집은 ㄱ자 형태로 꺾인 구조였고 정리되지 않은 작은 마당을 품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화단처럼 만들어진 자리에는 동백나무 한그루와 제멋대로 자란 식물들이 엉켜 있었다.
비 냄새와 함께 젖은 흙냄새가 은근히 올라왔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는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집 안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정숙은 툇마루에 서서 한참 동안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욕실 문 앞에 놓여 있던 옷가방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차부다이 위에 놓인 도시락과
가지런히 놓인 젓가락을 바라보다 무슨 생각에선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옷가방을 천천히 방 안으로 가져다 놓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