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51

by 삼류작자

택시에서 내린 정숙은 거대한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공항 청사를 올려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끝도 없이 뻗은 유선형의 천장은 마치 거대한 고래의 뱃속 같기도 했고,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오후의 강렬한 햇살은 은색 기둥들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였다.

그녀가 평생 겪어온 공장지대의 삭막한 풍경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 정숙에게 이곳은 단순히 공항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나 보던 먼 미래의 도시로 잘못 발을 들인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어리둥절해하는 정숙의 모습에 혜나는 공항이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며 과장되게 말을 늘어놓았다.


“언니, 넋 놓고 있지 마. 여긴 정신 안 차리면 바로 국제 미아 되는 데니까.”


정숙은 쥐고 있던 혜나의 옷자락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런 반응이 내심 재밌는지 혜나가 정숙의 팔꿈치를 툭 치며 앞장섰다. 정숙은 옷자락을 놓칠세라 뒤를 바짝 따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항은 생경한 활기로 넘쳤다. 정장을 빼입고 가죽 가방을 든 비즈니스맨들, 집채만 한 배낭을 짊어진 청춘들, 그리고 각국 언어가 섞인 안내 방송이 공중을 부유했다. 정숙의 눈에는 바닥에 표시된 색색의 화살표조차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기괴한 암호처럼 보였다.

중앙 홀에 다다르자 혜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정숙의 무거운 몸과 긴장으로 파리해진 안색을 살피더니 근처의 차가운 금속 의자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언니,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좀 알아보고 올게. 같이 움직이면 언니만 힘들어. 가방이나 지키고 계셔.”

혜나가 잡힌 옷자락을 살짝 떼어내려 하자, 정숙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혜나의 소맷자락을 더욱 억세게 움켜쥐었다.


“……같이 가요.”

혜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정숙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꾹 눌러주었다. 하지만 정숙의 손은 미세하게 떨릴 뿐 여전히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언니, 나 믿는다며. 나 믿지?”

잠시 눈을 마주하던 정숙의 손에서 그제야 스르르 힘이 풀렸다. 혜나는 싱긋 웃더니 정숙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선글라스를 장난스럽게 뺏어 쓰고는, 인파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며 사라졌다. 정숙은 혜나의 뒷모습이 수많은 사람 틈으로 완전히 매몰되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정숙은 의자 위에 덩그러니 앉아 혜나가 두고 간 여행 가방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꼭 움켜쥐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공간에서, 정숙은 유리창 너머 활주로를 보았다. 소리 없이 이륙하는 비행기가 남긴 희끄무레한 궤적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한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혜나는 발권 창구들을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괜찮았던 작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공항은 안방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공항의 중압감에 보안이 대단히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지만, 직접 겪어본 공항은 겉만 번듯할 뿐 속은 생각보다 엉성했다.

대부분의 발권은 현장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한일 노선의 단기 방문객은 일일이 현미경을 들이대며 검사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핵심은 절차가 아니라 ‘사람’을 잘 고르는 것이었다. 혜나는 여행안내 책자를 넘기는 척하며 다섯 명의 창구 직원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누가 가장 까다롭지 않게 대충 보고 넘길까?’


어느 정도 관찰 하던 중 혜나의 눈에 두 번째 창구의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그는 앞 손님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여권은 대충 훑고 곧장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그의 손에서 쉴 새 없이 뱉어지는 티켓과 경쾌한 도트 프린터 소리가 혜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저기다. ’

항공편은 6시 김포행 JL 959편.

혜나는 보기보다 꼼꼼했다. 창구마다 줄어드는 대기열의 속도와 직원의 손놀림을 한참 동안 더 관찰했다. 확신이 선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가 다시 정숙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시간여의 긴 기다림 끝에, 멀리 인파를 헤치며 나타난 혜나를 발견하자마자 정숙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짝 내디뎠다. 혜나는 승전보라도 들고 오는 듯 미소를 띤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왔다.


“언니, 6시 비행기로 하자. 여권 줘봐.”

혜나가 여권을 넘겨받아 빠르게 훑었다. 한국 여행 기록이 꼼꼼히 남겨진, 흠잡을 데 없는 여권이었다.


“언니, 우리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아 참, 선글라스.”

정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나는 제 머리 위에 얹어두었던 선글라스를 내려 정숙의 눈가에 조심스레 씌워주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미리 점찍어둔 창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혜나는 곁에서 느껴지는 정숙의 굳은 몸짓을 놓치지 않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언니! 어깨 펴. 무조건 당당하게.”

정숙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움츠렸던 어깨를 꼿꼿이 세웠다. 배를 교묘하게 가린 세련된 옷차림과 혜나의 손길로 완성된 화장, 그리고 정숙의 눈에 띄는 외모가 더해지자 철부지 상류층 여성처럼 보였다.

창구 앞에 도착하자 서너 명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차례가 한 단계씩 당겨질 때마다 정숙의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심장 소리가 귓가까지 울리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혜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정숙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마'라는 듯한 그 가벼운 눈짓에 정숙은 간신히 발밑의 떨림을 억눌렀다.

마침내 두 사람의 차례가 돌아왔고, 혜나는 망설임 없는 손길로 여권을 카운터 너머로 쑥 밀어 넣었다.


“로쿠지 소우루유키, 이치마이 오네가이시마스. 헨미치데.”

(6시 서울행 한 장요. 편도로요.)

직원이 여권을 펼쳐 사진과 선글라스 너머 정숙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무미건조한 눈빛이었지만, 그 너머의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직원이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韓国へはどのようなご用件ですか? 帰りの航空券は予約されていませんか?”

(한국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돌아오는 비행기 표는 예약 안 하셨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쏟아져 나오자 정숙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혜나가 얼른 말을 가로채며 능청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코노 사모님... 한코쿠노 토모다치 아이니 이쿠. 카에리노 치켓토와 아토데 요요쿠 스루.”

(아, 이 사모님... 한국 친구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돌아오는 표는 나중에 예약할 거고요.)


직원의 시선은 여전히 정숙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여권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확인 작업이 앞사람들보다 유독 길어졌다. 정숙은 등 뒤에 늘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기분에 식은땀이 흘렀다. 직원이 다시 입을 열어 정숙에게 직접 확인을 요청하려던 찰나, 혜나가 카운터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아, 사모님 니신 나나카게츠... 소시테 노도 가 이타이. 하나세나이데스.”

(아, 사모님 임신 7개월이라... 그리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 하세요.)


직원의 시선이 다시금 정숙을 향했다. ‘쫄지 말고, 무조건 당당하게.’ 혜나의 당부가 머릿속에서 경종처럼 울렸다. 정숙은 도리어 일처리가 지연되는 게 불쾌하다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고 선글라스 너머로 직원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눌린 탓일까. 직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둘러 서류 한 장을 내밀며 태도를 바꾸었다.


“あ, 失礼いたしました. これは機内での健康問題に関する免責誓約書です. チェックされた箇所に署명をお願いします.”

(아, 실례했습니다. 이것은 기내 건강 문제에 대한 면책 서약서입니다. 체크된 곳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혜나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 정숙이 담담한 표정으로 나서서 펜을 받아 들었다.

水原 美優 (미즈하라 미유)


정숙은 능숙한 필체로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렌조로부터 신분증을 건네받은 뒤, 때때로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 뜻 모를 이름을 수없이 따라 적었었다. 결코 이런 순간을 예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연습 덕분에 이후의 과정은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


곧이어 도트 프린터가 지지직 소리를 내며 빳빳한 항공권을 뱉어냈고, 직원은 가방에 수하물 태그를 꾹 눌러 붙여주었다.


“ゲートは12番です. 5時30分までにご搭乗ください.”

(게이트는 12번입니다. 5시 30분까지 탑승해 주세요.)



카운터를 벗어나 로비 한복판으로 나올 때까지 삐걱거리며 굳어 있던 두 사람의 발걸음은, 창구가 완전히 멀어지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풀렸다. 혜나가 정숙의 등을 두들기며 참았던 환호를 내질렀다.


“언니 봤지? 내가 뭐라 그랬어! 내가 무조건 보내준다 그랬잖아! 근데 언니, 아까 서명하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상한 거라도 쓸까 봐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정숙은 대답과 함께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옅고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설 속 미래 도시 같던 공항의 소음이 그제야 현실의 소리로 들려왔다. 하지만 가슴팍에 소중히 안아 든, 항공권이 끼워진 여권을 쥔 손목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비로소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이제 정말, 돌아갈 시간이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이별의 문, 출국 게이트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번쩍였다. 혜나는 정숙을 게이트 앞까지 바짝 데려다주고서야 멈춰 섰다. 저 문 너머로 발을 들이면 이제 정말 혼자가 된다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 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혜나가 품 안에서 투박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정숙의 손에 툭 던지듯 건넸다.


“자 이거 가져가요.”

정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보려 하자, 혜나가 정숙의 손을 꾹 눌러 제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봉투 안에는 한화로 환전된 만 원권 뭉치가 꽤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정숙이 거래 대금으로 건넸던 20만 엔과 가방에서 나온 30만 엔 중 절반을 떼어 미리 환전해 둔 150만 원이었다.


“이게 뭐예요? 혜나 씨 돈이잖아요.”


정숙이 당황해 봉투를 다시 밀어내려 하자, 혜나가 일부러 인상을 팍 쓰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아이고, 이 언니 진짜 답답하네. 언니 한국 가면 구걸해서 집까지 갈 거야? 가서 애도 낳아야 하고, 안 봐도 사정 뻔하구만. 나 공짜로 일 안 해. 가방에 있던 30만 엔 중에서 딱 절반만 주는 거니까 고마운 줄 알고 챙겨.”


혜나는 마치 돈 아까워 죽겠다는 사람처럼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정숙의 가방 깊숙이 봉투를 찔러 넣어주는 손길만은 단호했다.


“반은 내가 챙겼어. 나도 먹고살아야지.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그냥 가요. 이걸로 퉁친 거니까. 나 진짜 간다.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만나면, 그때는 언니가 나 도와주기다.”


“고마워요.. 혜나 씨.”

정숙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혜나가 질색하며 그녀의 등을 게이트 안쪽으로 떠밀었다.


“아, 우리가 뭐 그런 사이야? 빨리 가요! 나 진짜 간다.”


혜나는 훽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동안 말라붙어 가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정숙과의 이별은 생각보다 쓰라렸다. 인파 속으로 파묻혀가는 혜나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사라져 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정숙은 비로소 게이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발

간사이 18:00

도착

김포 19:40~19:50 (비행시간 약 1시간 40~50분)

기종

보잉 767 “JL 959, Seoul (Gimpo)”







쓰면서 영 마음에 안 드는 장이다. 후 일 대대적인 수정을 할까.. 어쨌거나 정숙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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