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비행기 좌석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내의 일정한 소음 속에서 몸의 긴장은 서서히 풀려갔고, 뱃속에서는 이따금씩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집으로 가고 있어.’
좌석 아래로 묵직한 진동이 전해졌다. 육중한 기체의 굉음이 고막을 스치고, 이내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어둠 속으로 떠올랐다. 창밖에는 검은 바다 같은 구름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정숙은 이상하게 중요한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정숙은 의자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해답 없는 생각을 더 붙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가 흐른 뒤, 스피커에서 기장의 차분한 일본어 음성이 흘러나왔다. 간결한 영어 안내가 뒤를 이었고, 잠시 간격을 두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한국어 안내가 이어졌다.
정숙은 천천히 눈을 떴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잠시 후 김포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안전한 착륙을 위해 좌석벨트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고,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원위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곧 도착한다는 그 한마디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창밖을 내다보자 어둠 아래로 도시의 불빛들이 보석을 흩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빛의 점들은 길게 이어져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저 불빛 어딘가에서, 분명 상훈 오빠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체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자 구름층을 통과하는 날개가 미세하게 떨렸다. 기체 하부에서 바퀴가 내려오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지척의 거리를 돌아오는 데 8개월 6일이 걸렸다. 어쩌면 다시는 밟지 못할 줄 알았던 땅이었다. 그러나 귀환은 불과 한 시간 반 남짓한 비행으로 허망하게 매듭지어지고 있었다. 길었던 시간들은 압축되어 단 한 번의 착륙으로 지워질 것만 같았다.
활주로에 바퀴가 닿는 순간, 묵직한 충격이 온몸을 통과했다. 제동의 진동이 서서히 잦아들고 기체가 완전히 멈춰 서자, 고동치던 심장도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입국 수속은 허무할 만큼 순조로웠다. 심사대 직원은 피곤한 눈으로 여권에 찍힌 잦은 출입국 기록을 훑더니 사진과 정숙의 얼굴을 한 번 대조했다. 찰나의 정적 뒤, 무심한 손놀림으로 도장을 쾅 내리쳤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공항 로비에 발을 내디뎠을 때, 정숙은 걸음을 멈췄다.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이쪽이야!”
“조심히 가, 연락하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뱃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한 번 더, 미약하지만 분명한 태동이 손바닥에 닿았다.
정숙은 공항 로비에 잠시 서서 천천히, 아주 깊게 공기를 들이켰다.
‘이제 다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