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에일과 와인이 있는 곳들
강릉은 관광도시이다. 해변가에는 큰 호텔들이 있고, 옛 정취가 느껴지는 고즈넉한 거리가 시내 한가운데 있으며, 커피라는 나름의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관광도시에서 맛있는 술을 구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닌 바, 몇 년 간 필자가 인상 깊게 다녀왔던 곳들을 소개한다. 편의점과 대형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술 정도로 만족한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는 없다. 반면 여행을 온 이상 강릉이나 영동권 로컬 맥주가 필수요건이라거나, 혹은 음주와 함께 정을 붙일 수 있는 분위기 있는 곳이 필요하다면 한번 읽어보시라. 이미 외지인 맛집이 된 버드나무브루어리는 따로 소개하지 않는다.
1. enoteca ottottobre
작년 가을 자전거 퇴근길에 가게 인테리어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대체 뭐하는 곳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곳인데, 이탈리아어가 가능한 분들에겐 굉장히 쉬운 이름일 듯하다. 직역하면 '10월 8일의 와인 저장고'라는 이름. 이탈리아 유학 중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귀국한 사장님이 작년 10월 오픈한 와인바이다. 이탈리아 와인을 주로 취급한다.
아담한 가게이다. 바닥 공간에는 테이블 2개와 바가 놓여 있고, 책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마루 공간에는 오래된 가구와 카펫 등으로 이루어진 특유의 인테리어 한편에 펼쳐진 스크린을 통해 고고한 취향의 음악을 감상하게 된다. 어두운 저녁길 지나가다 보면 문득 들어가고 싶게 생겼다.
이 정도면 흔하디 흔한 예쁜 가게 정도로 이야기가 끝나겠지만, 이 가게가 특별한 이유는 공간이나 와인이 아니다. 필자는 이 곳을 굉장히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여긴다. 주인의 내면을 펼쳐놓은 곳에 손님들이 잠깐 발을 담그고 떠나는 곳이라 해야 할까? 이 곳의 특별함은, 여기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곳이란 점에 있다.
보통의 가게에서는 손님들이 단순한 접객 서비스를 기대하며 들렀다 가고, 가게 측에서는 그러한 범주 내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떠나면 끝이다. 물론 이 곳도 과정은 동일하다. 손님들이 착석하면 주인이 다가와 와인리스트를 제공하고 적당한 설명을 하고 손님들이 고르는 그러한 과정. 다만 당신 테이블에는 와인병들이 직접 놓일 것이며 소년 같은 외모의 사장님이 이탈리아 지도를 들고 와인 한 병 당 수분의 설명을 조근조근 시작할 것이고 서로 간의 대화가 열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손님이 아닌 당신이라는 존재와 이곳 주인의 존재가 맞닿는다. 그래서인지 이 곳은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다. 많아도 2명. 테이블 크기도 그에 맞추어 작다.
어제의 당신이 인상적이었다면 사장님이 남몰래 정을 표시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샌가 당신도 그 사적인 공간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손님들도 풍경의 한 부분이 된다. 지나가다 잠깐 들르면 지난주에 봤던 분이 앉아 있다. 단순히 말하면 단골이겠지만, 그들을 그 단어로 표현하기엔 약간 모자라다.
와인들을 직접 맛보시고 골라오는 만큼 맛이 보증되지만, 보통의 가격대는 낮지 않다. 보통은 10만 원 이상, 가끔 5만 원 내외의 질 좋은 와인들을 구해다 추천해주시기도 한다. 간혹 잔술 판매도 한다. 잠깐 들러서 와인을 사 간다고 해도 일반적인 경험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월요일은 휴무. 보통은 6PM이후 오픈이다. 인스타그램 DM으로 오픈 시간 확인 및 예약은 필수.
강릉역에서 도보 15분.
강릉시 임영로 217 1층
https://instagram.com/enoteca_ottoottobre (비공개, DM 가능)
2. Lignum Pint
이번엔 가게 이름에 라틴어가 들어가 있다. 영어로 wood라는 뜻의 lignum과 맥주 한 파인트의 pint를 조합한 이름으로 보인다.
이 곳은 카페로 가득한 사천진 해변(여름엔 해변에 가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교통지옥..)과 가까이 위치하여 있다. 붉은 벽돌 건물을 새로 건축하여 한편은 에어비앤비 숙소, 다른 한편은 목공소, 그리고 펍으로 구성해놓은 공간이다. 직접 지으신 건물인 만큼 건축과 인테리어 구경하는 것만으로서도 들러볼 가치가 있다.
사장님 내외가 운영하시는데, 이 분들은 미국 founders brewery(이하 파운더스 브루어리)의 팬이신 듯하다. 오픈 시절부터 지금까지 메뉴판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맥주가 파운더스 브루어리의 배럴 에이지드 스타우트이다. 배럴 에이지드 스타우트는 위스키나 와인 등을 숙성한 오크통 내에서 맥주를 숙성시킨 스타우트로, 맥주 치고 높은 도수와 복합적인 향을 자랑한다. IPA에 집중하던 국내 브루어리들에서도 최근 이 배럴 에이지드 스타우트의 유행이 불고 있는데, 파운더스 브루어리가 국제적 유행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병맥주도 잘 보이지 않는 이 원조격 맥주의 탭 버전을 영동지방 교외에서 맛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원래는 CBS(Canadian Breakfast Stout)와 KBS(Kentucky Breakfast Stout)가 모두 있었는데, CBS 단종으로 KBS 한 종으로 줄었다. 가격은 좀 센 편이지만(사실 도수도 엄청 세서 취기 오르는 가성비는 비슷하다.) 꼭 마셔보자.
다른 라인업들을 보면 해외 맥주 탭은 꼭 포함되어 있고, 이외 속초의 몽트 비어와 핸드앤몰트 브루어리 등의 탭들이 있다. 강릉이지만 강릉스럽지 않은 구성이다. 요사이는 부데바요체 부드바가 들어와 있는데 이 또한 필자가 최고로 치는 라거 중 하나라, 고르시는 안목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안주들도 직접 개발하고 재료를 손질한 메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해변 쪽에 숙소가 있다면 번잡한 시내보다 이곳에 들러 맛있는 맥주와 안주를 즐기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일 터이다.
전용 페트병에 테이크아웃 가능(1L, 0.5L)한 것 역시 또 다른 장점이다. 필자는 거의 테이크아웃 후 집에 와서 마신다.
금토일 5PM 오픈. 사전 공지 없이 닫힌 경험은 없지만, 이동거리가 있는 만큼 미리 오픈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강릉시 사천면 손맞이길 132
033-643-8122
https://instagram.com/lignum_pint
3. Meent
강릉에서 가장 매력적인 동네인 명주-남문동 중심에 위치한 와인샵이다. 필자 딴에는 강릉에 내려오며 이 주변에 집을 구하면 좋겠다 싶던 동네인데, 필자만 그런 건 아닌지 가격도 가격이지만 아예 집이나 땅을 내놓는 사람도 잘 없는 곳이다. 낮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골목길에 모여있는 곳에 있던 오래된 일식 적산가옥을 개축한 공간이라 들었다. 요사이 관광객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라 그런지 지나다가 건물 앞에서 사진 찍고 가는 관광객들도 많이 보인다.
이 곳은 기본적으로 내추럴 와인을 취급하는 곳이다. 잘은 모르지만 숙성 시 들어가는 첨가물을 최소한으로 넣는 것이 특징인 와인이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와인만 먹으면 편두통(증상 발현 위험 인자에 와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알코올보다는 제조 시 들어가는 첨가물 등에 의해 유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발생하는 아내가 이 곳에서 구한 와인을 마시면 은근히 괜찮은 모습이다.
특유의 우디한 인테리어 구석에 위치한 빈티지 전축에서 올드 재즈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둘레둘레 살피고 있으면, 여사장님이 와인 추천을 해주시는데, 요사이는 손님이 꽤 많은 편이라 한가하실 때 직접 여쭙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보통 오늘 먹을 음식 아무거나 읊어 보는데(심지어는 나물도 읊어봤다) 잠깐 고민 중에 골라주시는 와인들은 맛이나 가격이나 다 바람직하다. 인심도 넉넉하셔 이것저것 잘 챙겨주신다.
이외에도 간단히 곁들일 간식과 올리브 오일 등을 판매 중이니 낮시간 명주동을 돌아보다 한 번씩 방문하시기를 권한다. 날씨 좋은 날 가면 더 금상첨화이다. 오래된 동네 특성상 진입로와 골목길이 좁아 차가 들어오면 여러모로 고역이니 주차는 다른 곳에 해놓고 도보로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가격대 다양. 최소 2만 원부터.
목/금/토 1PM-5PM (휴무 공지는 인스타를 참고하자)
강릉시 경강로2018번길 25
https://instagram.com/meent_kitchen
4. 강릉 브루어리
강릉 시민들 이용률이 높은 곳이다. 최대 번화가인 교동택지에 위치해 있고, 관광지 주민들 특성상 유명한 곳을 꺼리기도 하는 것이 연유이다. 꽤 넓은 공간이고, 유리벽 건너편엔 맥주 양조 시설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 코로나 시국엔 유명무실하지만 연회장 급의 테이블이 놓인 방도 있다.
맥주 브루잉 강사로 활동하시는 분이 사장님이시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매 시즌 새로운 종류의 맥주가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탭하우스에서 주기적으로 탭 리스트를 업데이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직접 양조하는 브루어리라면 더욱더 새로운 라인업에 대한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본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이지만, 강릉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양조장은 이곳뿐이다. 물론 이러한 업데이트의 반작용이라면, 몇 년 전 겨울에 맛있게 마셨던 Bock이, 다른 손님들 반응은 그다지였는지 이후엔 보이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다는 것?
도수가 10도에 육박하는 막걸리도 같이 판매하는데, 이게 또 엄청나게 맛있다. 여기에 가면 맥주 말고 막걸리를 먼저 찾는 사람도 있을 정도. 여러모로 양조장으로서 충실한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식사 후 간단히 맥주 한두 잔 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소규모 양조장 특성상 간혹 수급이 불안정한 탭이 있는 경우가 있다. 맥주 테이크아웃은 불가하다. 병맥주는 현재 소량으로 구성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보인다. 드래프트 포장을 원한다면 가능 여부에 대한 문의가 필요하겠다.
월-토 17:30 PM - 23:30 PM
강릉시 율곡초교길11번길 9
033-655-1357
5. 파이브문스크래프트 탭하우스 (영업종료)
강릉에서 가장 맥주 라인업이 풍부한 곳이다. 교동택지 치고 묘하게 후미진 이 자리에는 본디 필자가 애정했던 페루 음식점 겸 탭하우스 골론드리나가 있었는데, 평창 올림픽 이후 현재의 가게로 바뀌었다. 이전 가게를 워낙 좋아했던 탓에 이상하게 발길이 잘 가지 않았는데, 최근 들러보니 10여 종 이상의 탭과 냉장고 안의 귀한 보틀 등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변모했다.
드래프트 라인업은 가장 무난한 하이네켄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브루어리들에서 공수해온 계절 맥주, 그리고 몽스 카페, 올드 라스푸틴 등 매니악한 것들까지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바틀샵만큼의 종류나 가격은 아니겠지만 냉장고 안에는 double IPA 종류들, 벨기에의 딜리리움 시리즈 등 강릉 다른 곳에선 절대 구할 수 없는 것들 역시 갖추어져 있다. 이외에도 인테리어 등을 둘러보면 사장님의 맥주에 대한 식견이 절로 느껴진다.
주방을 겸하다 보니 안주들은 일반 맥주집에서 볼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이다. 모두가 술맛을 즐기러 오는 것은 아니니(이런 곳에 다른 분들과 오다 보면 어영부영 빠지지 않는 주제가 있는데, 바로 카스 맥주 품평이다.), 이 곳만의 시그니처 안주가 하나쯤은 갖추어져 있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이외 빈티지한 건물과 인테리어가 특징인 범핀, 강릉권 유일하게 공연 관람이 가능한 뮤직바 러쉬, 평창 화이트크로우 브루어리를 맛볼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몬타냐, 사천진 해변의 바이닐펍 씨사이드 등 다양한 곳이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