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iation 3 . 베르디

《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 별책부록

by 이정민 Ophelia


포도밭과 오페라 사이의 거장


포도주는 예로부터 생명의 근원,

곧 life-sustaining drink ..

생명을 지탱하는 음료로 여겨졌다.

바쿠스와 디오니소스의 손에 쥐어진 포도송이에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노래, 풍요의 씨앗이 함께 자라났다.


그래서 이번 Variation의 주인공이 베르디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오페라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포도밭을 가꾸고 와인을 빚으며

“삶을 지탱한 예술 ( life-sustaining art )”을 노래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모자 쓴 베르디 초상 (Boldini, 1886)


그의 잔에는 흙의 기억과 계절의 숨결이 머물렀고,

그 안에서 노래가 싹을 틔웠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언제나 무대와 포도밭 사이,

두 세계가 만나는 경계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하루는 흙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Villa Sant’Agata ~ 그 저택은 평범한 집이라기보다,

베르디가 삶을 마음껏 지휘해 보라는 연단 같았지요.


Villa Verdi

: 베르디가 농부이자 작곡가로 살며,

흙과 노래의 숨결을 함께 지켜낸 집.

어제와 오늘을 잇는 두 얼굴의 무대.



창을 열면 포도밭이 바람에 흔들리고,

들판에서는 흙냄새가 뒤섞이며

그에게 또 다른 선율을 선물하곤 했겠죠..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져요.

“나는 농부일 뿐.”

겸손한 한 마디 뒤에는, 흙을 일구는 리듬과 곡을 짓는 선율이 하나의 악상처럼 이어지는 일상의 호흡이 담겨 있었어요..

1848년, 그는 무대에서 흘린 땀으로 얻은 결실을

산타가타의 대지에 뿌렸습니다.

약 350 biolche (100헥타르 남짓) 의 토지.

포도밭과 곡물밭,

가축을 기를 마당이 함께 있었고,

관개 설비 macchina dell’Ongina가 물길을 열어 주었지요.

부모를 위해 집을 넓혔고,

지우세 피나 스트레포니와 함께 머물 터전이 되었어요.


사실, 그의 마음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상실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첫 아내 마르게리타와 두 아이, 버지니아와 이치오를 모두 먼저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La terza bara usciva dalla mia casa…

ed io rimasi solo.”

(세 번째 관이 내 집에서 나갔다… 나는 홀로였다.)


그는 음악을 그만두려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모두 음악과 얽혀 있었기에, 다시 마음속에 음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이 되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음악은, 그에게 더 이상 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상실을 더욱 선명히 비추는 거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음악가는 때로 어떤 순간을 - 공간과 빛, 손끝의 감촉, 심지어 향과 맛까지 - 음악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음악은 가장 사라지기 쉽고 덧없는 순간조차도

영원히 붙잡아두는 힘을 지니며,

더 자연스럽고 더 오래도록 마음속에 저장하는

마법을 부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를 붙잡아 준 것은 흙과 대지였어요.


푸른 언덕과 포도밭, 토스카나가 건네는 풍요와 위로



땅을 일구면 언젠가 열매가 맺혔고,

바람은 그의 얼굴을 스치며 생각의 무게를 흩어주었어요.

해와 달, 새와 나비 같은 곤충들의 움직임은

멈춘 시간에 다시 흐름을 불어넣어 주었지요.

그는 땅을 돌보며 살아 있음을 느꼈고,

대지에서 주는 생동감 속에서

다시금 내면의 음악을 붙잡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 카를로 베르디는 작은 여관과 식당을 꾸려 살림을 이어 갔어요. 음악가 가문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아들에게 물려주었지요.


곁에는 언제나 동반자 스트레포니가 있었어요.


조세피나 스트레포니

: 무대 위의 소프라노에서 베르디의 동반자이자 조언자가

되기까지, 그의 삶과 음악에 함께 머문 존재.



밀라노와 파리를 밝히던 소프라노였던 그녀는 산타가타로 돌아와 그의 조언자이자 집안의 쉼표가 되었지요.

집은 언제나 제자와 손님, 그리고 음악으로 가득했어요.


베르디의 정원은 특별했어요.

포도넝쿨 사이로 바나나 나무가 이국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연못은 계절마다 달빛을 품었지요.


왼쪽 : 세콰이아 (Sequoiadendron giganteum)

세기를 거슬러 서 있는 세콰이아,

베르디 정원의 시간의 지킴이.


가운데 : 목련 (Magnolia grandiflora)

봄마다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목련,

정원에 음악처럼 스며든 계절의 화음.


오른쪽 : 세콰이아 숲 (Sequoia Grove)

해를 품은 숲,

거대한 세콰이아들이 빚어내는 성스러운 침묵.


1868년 주문서에는 플라타너스 120그루, 라리크스(larch) 6그루, 세쿼이아(sequoia), 맥클루라(Maclura), 마그놀리아(magnolia)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어요.



그 목록은 악보처럼 펼쳐져갔고, 심어진 나무들은 각기 다른 음색으로 화성을 담아내듯 자라났어요.


베르디의 삶을 품은 정원

: 꽃과 나무, 고요한 연못이 함께하는 풍경



식탁은 또 하나의 무대였어요.

리소토로 정찬을 열었고, 일상에는 따뜻한 쌀 수프를 즐겼어요. 잔이 돌 때마다 음악의 색은 한 겹 더 깊어졌겠죠…


왼쪽 : 오소부코와 리소토 알라 밀라네제

향긋한 사프란 빛깔 위에 송아지 사태가 올려진 전통의 디쉬.

오른쪽 : 사프란 리소토

황금빛 쌀알 사이로 퍼지는 치즈 향, 밀라노 식탁의 따뜻한 정수



스트레포니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어요.

“Se sapessero poi come compone il risotto alla milanese, Dio sa quali ovazioni gli pioverebbero sulle spalle!”


직역) 사람들이 그가 ‘밀라노식 리소토’를

어떻게 구성(compone)하는지 알기만 한다면,

어떤 환호가 그의 어깨 위에 쏟아질지는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


풀이) 그가 리소토를

마치 음악을 짓듯 만들어 내는 솜씨를 안다면,

사람들은 오페라에 보내는 갈채처럼

열렬한 박수를 그의 어깨 위에 쏟아냈을 것이다.


그의 와인은 대체로 라벨이 없었어요.


.라벨 없이 나누었었던 베르디의 라브루스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탈리아의 향기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포도밭에서 거둔 라브루스코(Lambrusco)를

가까운 이들과 나누었고,

때로는 토스카나의 키안티(Chianti),

보르도(Bordeaux)의 깊은 빛,

크레모나에서 도착한 샴페인의 거품이 식탁을 물들였지요.

중심에는 언제나 흙과 계절의 숨결이 있었어요.


《나부코》(Nabucco, 1842)의 성공은

그에게 명성과 요구를 한꺼번에 안겨 주었어요.


왼쪽: 1842년 초연 프로그램 표지

가운데: 리코르디 판본

오른쪽: 현악 파트보 악보



1842년, 《나부코》의 막이 올랐을 때 무대 위에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날개 위에 실려 가는 생각이여~~“


이 노래는 억눌린 땅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이탈리아인들에게 비공식 애국가가 되었어요. 객석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박수는 마치 해방을 앞당기려는 심장의 고동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날 밤, 베르디는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대를상징하는 작곡가로 떠올랐습니다.




쉼 없이 써야 했던 < ‘갈레라(galera)’의 시기 >


그는 그 대가를 산타가타의 흙으로 모두 돌려보냈어요.

그 선택은 투자라기보다,

과열된 환호를 가라앉히고

자신을 대지에 묶어 두려는 몸짓에 가까웠지요.


소몰이는 리듬,

수확은 선율,

바구니로 떨어지는 포도알은 화성.

그 소리들은 음악의 진행처럼,

마치 음악을 구성하는 핵심처럼 들려왔어요.

그는 무대 위 영웅들의 노래를 지으면서도,

농부의 박자와 호흡을 잊지 않았습니다.




• About 갈레라(galera)의 시기


쉼 없이 써야 했던 ‘갈레라(galera)의 시기’

그가 스스로를 오페라의 노예라 불렀던,

그러나 가장 빛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였습니다.


‘갈레라(galera)’는 원래 지중해의 노 젓는 배,

즉 갤리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로 죄수나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여

강제로 노를 저어야 했던 배였지요.

베르디는 자신의 생애 중 한 시기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1842년 《나부코》의 성공 이후부터 1859년 《운명의 힘》 전까지, 약 17년간(그의 나이 29세에서 46세 무렵까지) 그는 매년 두세 편의 오페라를 쉼 없이 써내려가야 했습니다.

끝없는 청탁,

초연의 압박,

그리고 쉴 틈 없는 작업은 그를 마치 노예선에 묶인 사공처럼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짙은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빛처럼,

그 고된 시절 속에서

《리골레토》(1851),

《일 트로바토레》(1853),

《라 트라비아타》(1853) 같은

주옥같은 걸작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힘겨운 사슬 같은 시기가,

가장 찬란한 음악을 낳은 시간이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를 끝내 버티게 한 것은 정원의 나무들과 흙냄새, 계절마다 새로운 선율로 이어지던 자연의 호흡이었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