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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ug 28. 2023

우리 집 베란다엔 아무것도 없어요

비움 번외 편 1) 베란다

"고객님, 제가 오늘 좀 빨리 도착했네요. 지금 올라가도 될까요?"


에어컨 수리를 받기로 한 날,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일찍 주차장에 도착한 기사님은 조금 일찍 방문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올라오세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작업용 슬리퍼(남편 슬리퍼)를 베란다 쪽 실외기실 앞에 가져다 놓으려는 찰나, 그곳의 문 앞에 놓인 거대한 물건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 실내 스포츠용으로 구매했던 3 in 1 탁구대였다.


(인터넷에서는 접이식 탁구대/ 미니 당구대 / 탁구 테이블 / 실내 탁구다이 / 미니 탁구대 / 접이식 탁구대 등으로 검색된다)


아, 맞다 이게 여기에 있었구나.



시간을 거슬러 이 집으로 이사오던 날을 떠올린다.


"사모님, 이거 어디에 놓을까요?"


예전 집에서는 거실에 두었던 미니 탁구대를 놓을 곳이 마땅치 않은 지 나를 호출한다.


"현관 옆 창고에는 안 들어가나요?"

"네 창고는 선반식이어서 어려워요."


이 물건은 가로세로 120cm X 70cm의 거구였다. 시스템 수납장으로 짜인 창고에는 눕힐 수도 세울 수도 없는 사이즈다. 그렇다고 중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좁아진 거실에 떡하니 둘 수도 없는 노릇. 거의 사용하지 않아 먼지만 쌓여 있던 데다 공간만 차지해서 볼 때마다 신경에 거슬렸던 터였기에 눈앞에서 되도록 멀리 치워버리고 싶었다.


"에휴, 베란다에 대충 두세요. 제가 나중에 치울게요."


그나마 안방 쪽 베란다 공간에 여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체념한 듯 말해버린 그날 이후, 이 녀석은 몇 년째 베란다 안쪽 실외기실 문 앞에 대충 걸쳐진 상태로 지내온 것이다.


에어컨을 수리하려면 이것부터 치워야 했고, 기사님한테 이 무거운 걸(약 20KG) 직접 옆으로 옮긴 후에 실외기실에 출입하시라고 말씀드리기엔 염치가 없었다. 기사님이 주차장에서 집까지 올라오는 시간은 대략 3분.


탁구대를 3분 안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어기적어기적 한쪽 귀퉁이를 축으로 삼아 다른 쪽을 회전시키고, 다시 그쪽을 축으로 삼아 돌리는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한 끝에 반대편 완강기실(이 역시 베란다 안쪽에 위치) 문쪽으로 옮길 수 있었다.


며칠 후, 셀프 소방 점검 결과를 제출하라는 안내문이 왔다. 체크해야 할 부분에는 완강기실에 물건이 없는지, 완강기 상태는 정상인지 등을 확인해야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들어가 보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는 공간이지만,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재난이나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이 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또 그 탁구대. 이제는 한숨도 안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용암 같은 불덩이가 올라올 뿐.


그날 나는 바로 재활용 센터에 연락해 수거 비용을 이체했다. 하지만 비우기를 결심했다고 해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돈을 지불한 이상 쓰레기장에 내놓아야 한다. 여전히 푹푹 삶는 날씨에  해는 뜨거웠으며 이놈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탁구대의 정체(현관 앞에서 출가 대기 중)

탁구대를 폴딩카트에 가로로 눕히고는 진격에 나섰다.


(나가는 길 1층 공동현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다시 들어서 세로로 둘러업어야 했고,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기에 폴딩카트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몇 번이고 떨어졌지고 엎어졌으며, 그때마다 다시 일으켜세워야 했다)


'곧 끝날 거야. 조금만 참자.'



고생 끝에 낙이 왔다. 후련했다.


늘 가로막고 있던 물건이 없어진 베란다는 널찍해져서 보기에도 좋았다. 덕분에 창문 너머의 나무들도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창밖 나무 위로 날아든 새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생각보다 가까워서 조금 놀랐지만). 비로소 이 공간에도 숨이 트이고 활기가 도는 듯했다. 이렇게나 생명력 있는 공간이 그동안 죽어가고 있었던 거구나.


'이 참에 싹 다 없애버릴까?'


베란다에 놓인 물건들을 둘러보니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높은 곳의 물건을 꺼낼 때 사용하는 플라스틱 의자, 썩어가는 빨래판, 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정체불병의 나무틀?, 식물은 없고 흙만 남아 나뒹구는 미니 화분들. 대부분은 지금 당장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으며, 앞으로도 찾지 않게 될 물건들인 것이다.(김치통은 바로 채광이 없는 창고로 이동)

베란다 잡동사니들

'덩치 큰 탁구대도 버렸는데 이 까짓 조무래기들은 일도 아니지.'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하나 비워나갔다.


생각해 베란다에 물건들이 있어서 불편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강아지들이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슬리퍼를 물고 들어왔고, 한 번은 다육이를 죄다 물고 들어와서 침대 위에서 질겅질겅 씹어대는 통에 안방 바닥이며 침대며 한바탕 흙난리가 난 적도 있다(그 이후 식물은 모두 뽑아서 버림). 웬만하면 안방 쪽 창문을 꽁꽁 닫고 지내면서 환기할 때만 강아지들을 쫓아내고 창문을 개방했다.


그러나 빨래나 옷을 걸 때는 베란다에 출입을 해야 했으므로, 강아지가 따라오기 전에 잽싸게 창문을 닫다가 손을 다친 건 또 몇번인지.


"비우기 귀찮다"는 이유로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모시느라 참 "불편"하게 살았던 것이다. 탁구대가 턱 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엄두도 내지 못해고, 그냥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거라고 합리화했으며 솔직히 문제가 뭔지도 몰랐다.


물청소를 하고 스퀴지로 물기를 없앤 후 걸레로 박박 닦으니 베란다 바닥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강아지들이 하도 물어뜯어서 너덜너덜해진 슬리퍼를 버리고는 녀석들이 언제든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맨발로 베란다를 딛으며 작은 해방감을 느껴본다.

비움 이후, 아무것도 없는 베란다

불쑥,

'여기에 홈카페를 만들어 커피라도 한 잔씩 할까? '

방심을 틈타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이 오면,


'아이고 이 못난 인간아! 공간이 생기니까 또 물건 들일 생각을 하는 거냐?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이 좋은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정신 차리소!'

스스로 멱살을 잡고 뼈를 때려본다.


그나저나 막상 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니 강아지들이 베란다에 나가질 않는다. 하지 말라면 기를 쓰고 하다가도 자유롭게 놔두면 굳이 안 하는 모양새개나 사람이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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