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회사에서는 출근 후 책상 앞에만 앉으면 한숨부터 나왔다.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아침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팀 캐비닛에서 과자를 집어 오는 것이었다. 조금 먹다가 고무줄로 대충 묶어놓고, 또 다른 봉지를 뜯었다. 이따가 먹자고 생각하고는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은 다른 주전부리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거의 매일 반복했다.
어느 날 동료가 스테이플러를 빌려달라 했다. 기꺼이 빌려드리겠다는 대답과 함께 책상서랍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는 재빨리 닫아버렸다.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1) 서랍 속이 이 정도로 지저분할 줄은 몰랐다.
2) 스테이플러를 찾으려면 수북이 쌓여있는 과자 봉지와 서류/우편물을 걷어내야 했다.
3) 책상 서랍을 여는 상황을 동료가 지켜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당황하는 나를 보며, 동료는 농담 삼아 한마디를 던졌다.
"생각보다 좀 더럽네요?!!"
"네, 많이 인간적이쥬?"
그날은 하루 종일 어지러운 서랍에 신경이 가서 머리까지 뒤죽박죽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도 늘 마주하는 서랍이건만 이제는 그 공간 자체가 짜증 나고 싫어졌다. 동료의 일침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쩌면 어딘가로부터 그런 돌직구가 날아들길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도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회피하고 외면하며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살았던 것이다.
그날 퇴근 전에 싹 다 정리해버렸다.
이 작은 공간에서 쓰레기가 한 무더기 나왔다.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와 초콜릿, 일회용 물수건, 사용하지 않는 텀블러, 각종 우편물, 작년/재작년 다이어리, 구닥다리 소형 카메라(어디서 주워 온 서랍장임), 아무렇게나 말아놓은 머플러까지. 골동품샵인지 잡화점인지 쓰레기장인지 컨셉도 불분명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개는 쓸모없는 것, 아니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쓸만한 물건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워냈다. 서랍 속에 여유가 생겼다.
책상 위 소형 수납장 칸도 용도별로 분리했다. 필요 없는 건 버리고 USB, 미용, 사무(집게, 클립) 등으로 나누어 수납했다. 말끔하고 명료해졌다. 내친김에 책꽂이에 있던 철 지난 보고서 프린트물, 오래된 실무 가이드북도 모두 버렸다. 이제꼭 필요한 서류나 책은 서랍 안에 넣어두면 되니 책꽂이는 필요가 없어졌다. 분리수거함에 가져다 놓았다.
의자를 밀어 넣고 퇴근하려는데 난생처음으로 내 책상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미관상으로도 깨끗했고 불필요한 물건이 없어 정갈했다.
다음 날 이후, 똑같은 책상에 앉았지만 한숨이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회사 분위기나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하는 상사 등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공간만은 편안했다. 이렇게 정리된 환경이라면 힘을 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집중력이 좋아져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시로 과자를 가지러 캐비닛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서랍에서 물건을 꺼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꾸만 책상 위를 닦고 싶어졌다. 가끔 화나는 상황이 올 때마다 책상을 닦으며 의식적으로나마 평정심을 유지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자,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
바쁜 날이라도 퇴근 시간이 되면 일부러 느긋하게 책상을 치우고 서랍 속에 물건들을 다 수납한 후 책상 위를 닦았다. 하루종일 분주했던 나에게 숨 고르기 할 시간을 선물했다. 퇴근 전 책상 정리 습관은 회사 생각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 데에도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회사와 일상 사이의 선긋기 의식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퇴근 시 내 책상
올 4월 새로운 회사에 취업했고, 감사하게도 재택근무 조건으로 일을 하고 있다.
입사일이 결정되고 난 후, 업무 공간을 구상할 때떠오른건, 퇴사하는 날까지 청결을 유지했던 예전 내 책상이었다. 다시 한번 그런 공간에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안방 침대 옆에 홈오피스를 꾸리게 되었다. 창고 묵혀 두었던 이케아 화이트 테이블을 방으로 들여왔다. 약 7년 전에 3만 원에 구매했는데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녀석이었다. 세월의 풍파로 하얀 상판이 누리끼리하게 변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흠집이나 이염은 없었다. 가로길이 약 1m로 공간 차지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공간을 마련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상 위가 지저분하게 방치된 적은 없다.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소한의 물건들만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많으면 더 어질러질 법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깨끗한 공간을 유지하고 싶기에 질서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키보드, 작은 정리함, 마우스, 스탠드가 전부다. 필요한 물건만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기에 맑은 정신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물건들이 늘어져 있지 않는 환경은 평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심호흡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이 되고, 답답한 속을 달랜답시고 수시로 자리를 뜰 일도 없다.
화이트 계열을 좋아하는 취향 대로 사무용품 역시 올 화이트에 가깝다. 군데군데 그레이나 블랙이 곁들여지니 잘 어울려서 보기에도 좋다. 차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고 싶을 땐 우드 톤의 쟁반에 가져다 먹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미소가 지어진다. 컬러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일을 마치면 노트북을 꼭 덮고, 키보드를 뒤쪽으로 이동시켜서 업무와 일상을 완전히 구분한다. 간식 그릇과 텀블러, 쟁반을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그날 생긴쓰레기도 싹 비워낸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또 (불필요한 것은)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아침이 설레는 이유다.
현재 업무 중 / 퇴근 후 책상. 별도 서랍은 없고 옆쪽에 공중부양 방식으로 몇가지 물건을 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