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라미 Sep 21. 2023

내 책상 위엔 아무것도 없어요

비움 번외 편 - 2) 책상

예전 회사에서는 출근 후 책상 앞에만 앉으면 한숨부터 나왔다.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아침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팀 캐비닛에서 과자를 집어 오는 것이었다. 조금 먹다가 고무줄로 대충 묶어놓고, 또 다른 봉지를 뜯었다. 이따가 먹자고 생각하고는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은 다른 주전부리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거의 매일 반복했다.


어느 날 동료가 스테이플러를 빌려달라 했다. 기꺼이 빌려드리겠다는 대답과 함께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는 재빨리 닫아버렸다.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1) 서랍 속이 이 정도로 지저분할 줄은 몰랐다.

2) 스테이플러를 찾으려면 수북이 쌓여있는 과자 봉지와 서류/우편물을 걷어내야 했다.

3) 책상 서랍을 여는 상황을 동료가 지켜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당황하는 나를 보며, 동료는 농담 삼아 한마디를 던졌다.


"생각보다 좀 더럽네요?!!"

"네, 많이 인간적이쥬?"


그날은 하루 종일 어지러운 서랍에 신경이 가서 머리까지 뒤죽박죽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도 늘 마주하는 서랍이건만 이제는 그 공간 자체가 짜증 나고 싫어졌다. 동료의 일침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쩌면 어딘가로부터 그런 돌직구가 날아들길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도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회피하고 외면하며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살았던 것이다.


그날 퇴근 전에 싹 다 정리해버렸다.


이 작은 공간에서 쓰레기가 한 무더기 나왔다.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와 초콜릿, 일회용 물수건, 사용하지 않는 텀블러, 각종 우편물, 작년/재작년 다이어리, 구닥다리 소형 카메라(어디서 주워 온 서랍장임), 아무렇게나 말아놓은 머플러까지. 골동품샵인지 잡화점인지 쓰레기장인지 컨셉도 불분명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개는 쓸모 없는 것, 아니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쓸만한 물건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워냈다. 서랍 속에 여유가 생겼다.


책상 위 소형 수납장 칸도 용도별로 분리했다. 필요 없는 건 버리고 USB, 미용, 사무(집게, 클립) 등으로 나누어 수납했다. 말끔하고 명료해졌다. 내친김에 책꽂이에 있던 철 지난 보고서 프린트물, 오래된 실무 가이드북도 모두 버렸다. 이제 꼭 필요한 서류나 책은 서랍 안에 넣어두면 되니 책꽂이는 필요가 없어졌다. 분리수거함에 가져다 놓았다.


의자를 밀어 넣고 퇴근하려는데 난생처음으로 내 책상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미관상으로도 깨끗했고 불필요한 물건이 없어 정갈했다.


다음 날 이후, 똑같은 책상에 앉았지만 한숨이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회사 분위기나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하는 상사 등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공간만은 편안했다. 이렇게 정리된 환경이라면 힘을 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집중력이 좋아져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시로 과자를 가지러 캐비닛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서랍에서 물건을 꺼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꾸만 책상 위를 닦고 싶어졌다. 가끔 화나는 상황이 올 때마다 책상을 닦으며 의식적으로나마 평정심을 유지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자,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


바쁜 날이라도 퇴근 시간이 되면 일부러 느긋하게 책상을 치우고 서랍 속에 물건들을 다 수납한 후 책상 위를 닦았다. 하루종일 분주했던 나에게 숨 고르기 할 시간을 선물했다. 퇴근 전 책상 정리 습관은 회사 생각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 데에도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회사와 일상 사이의 선긋기 의식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퇴근 시 내 책상


올 4월 새로운 회사에 취업했고, 감사하게도 재택근무 조건으로 일을 하있다.


입사일이 결정되고 난 후, 업무 공간을 구상할 때 떠오른 , 퇴사하는 날까지 청결을 유지했던 예전 내 책상이었다. 다시 한번 그런 공간에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안방 침대 옆에 홈오피스를 꾸리게 되었다. 창고 묵혀 두었던 이케아 화이트 테이블을 방으로 들여왔다. 약 7년 전에 3만 원에 구매했는데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녀석이었다. 세월의 풍파로 하얀 상판이 누리끼리하게 변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흠집이나 이염은 없었다. 가로길이 약 1m로 공간 차지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공간을 마련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상 위가 지저분하게 방치된 적은 없다.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소한의 물건들만 올려져 있기 때문다. 여백이 많으면 더 어질러질 법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깨끗한 공간을 유지하고 싶기에 질서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키보드, 작은 정리함, 마우스, 스탠드가 전부다. 필요한 물건만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기에 맑은 정신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물건들이 늘어져 있지 않는 환경은 평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심호흡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이 되고, 답답한 속을 달랜답시고 수시로 자리를 뜰 일도 없다.


화이트 계열을 좋아하는 취향 대로 사무용품 역시 올 화이트에 가깝다. 군데군데 그레이나 블랙이 곁들여지니 잘 어울려서 보기에도 좋다. 차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고 싶을 땐 우드 톤의 쟁반에 가져다 먹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미소가 지어진다. 컬러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일을 마치면 노트북을 덮고, 키보드를 뒤쪽으로 이동시켜서 업무와 일상을 완전구분한다. 간식 그릇과 텀블러, 쟁반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그날 생긴 쓰레기도 비워낸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아침이 설레는 이유다.

현재 업무 중 / 퇴근 후 책상. 별도 서랍은 없고 옆쪽에 공중부양 방식으로 몇가지 물건을 보관합니다

자매품 >>>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 베란다엔 아무것도 없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