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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28. 2023

못 생겨도 괜찮은 미니멀라이프

천천히 뚜벅뚜벅

지난 1년 간 꾸준히 비워냈다.


옷에서부터 출발해 묵혀 두었던 책, 고장 난 전자기기, 장난감과 미술 작품, 반찬 통, 돗자리, 운동용품에 이르기까지 안 쓰는 물건들을 차례차례 처분했고, 소생 가능한 용품은 중고거래로 새 주인을 찾아주기도 다.

비워낸 물건들

이쯤 되면 집이 알아서 아늑하고 정갈한 모습을 드러낼 법하건만, 집안 꼴은 여전히 그대로다.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변화라도 있겠지 싶어 부엌과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지만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는 듯하다. 분명히 바닥을 점령하고 있던 플라스틱 박스들과 빨래 건조대를 치워버렸는데도 말이다. 안쪽 공간들도 마찬가지다. 일단락 지었다고 생각한 주방 수납장에는 아직도 비워져야 할 오래된 주방 기구가 남아 있고, 알파룸(팬트리)에 들어찬 추억 속 물건들은 비워도 비워도 계속 나오는 모양새다.


그러는 사이에 싱크볼 안은 설거지를 기다리는 그릇들로 채워지고 식탁 위에는 자질구레한  생활 용품과 쓰레기가 나뒹굴기 시작한다. 돌아서기 무섭게, 아니 숨만 쉬는 데도 그날의 찌꺼기들이 쌓여가는 것이다. 


안그래도 비워 낸 티가 안 나서 야속해 죽겠는데, 집은 틈만 나면 못 생긴 상태로 되돌아가려 한다. 슬슬 미워진다.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건, "남의 집"의 하얀 벽지와 여백이 풍부한 공간이 주는 단정함에 이끌리면서부터다. 예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시각적으로도 훌륭했고, 우드톤과 어우러진 색감의 조화는 자꾸만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물건이 없는 집에 깃든 아름다움을 우리 집으로도 가져오고 싶어졌다.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의 뿌리는 미니멀리즘이었고, 비워내는 습관을 통해 마음까지 홀가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나도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때 마침 옷을 비워내면서 물건이 주는 풍족함보다 공간이 주는 충만감에 더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터였다.


결혼 17년 차. 성질이 급한 강산이라면 두 번도 바뀌었을 만큼의 세월이다. 이 시간들은 나에게 주름살과 흰머리를, 우리 집에는 차곡차곡 쌓여가는 물건들을 선물(?) 해주었다. 일단 들어앉은 물건들은 그대로 누워버리고는 의식적으로 들어내지 않으면 방을 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안방, 화장실, 아이들 방, 주방, 거실 등 집안 곳곳에 분산되어 "양이 많아 보이지 않도록" 속임수를 썼다. 마음만 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다 비워낼 수는 없는 분량이었던 것이다.


비움 생활은 고작 1년 남짓. 묵어 있던 세월에 비하면 어림없는 시간이다. 시간의 덧셈을 간과한 채 마음만 앞서서 한달음에 미니멀리즘의 세계로 안착하려 하다니, 욕심이 아닐 수 없다. 완전히 다른 별에서 온 이방인 주제에 말이다.  


미니멀리즘 고수들의 삶은 그야말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정제된 형태이며, 그들의 예쁜 집은 결과물일 뿐 경지에 이르기 위해 견뎌온 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겉모습에 매혹된 나머지 그들의 지난한 노력마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게다가 눈에 보이는 하얗고 휑한 집에 현혹되는 바람에 미니멀리즘의 본질을 잊기도 했다.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의 저자 에리카 라인이 정의한 것처럼, "미니멀리즘이란 자신에게 꼭 맞는 삶을 살겠다는 선택"일 뿐, 미니멀 풍의 인테리어를 입힌 획일화된 모습은 아닌 것이다. , 초점불필요한 것은 거두어내고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실천적 습관에 두어야 한다. 예쁜 집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망각하고 말았다.


우리 집이 여전히 못 생겼다고 미워하는 대신, 쓸모없는 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 나의 삶은 이미 아름답다는 믿음을 가져본다. 느린 속도로 나마 이 방향으로 걷다 보면 동경하는 집의 모습에 저절로 다다를 수 있으며 설사 겉모습이 예쁘지 않아도 마음의 모양만 가지런하다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미니멀리스트라는 정체성은 신데렐라의 드레스를 만든 요술봉이 아닌, 점진적인 변화로 얻어지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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