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자 주변은 잘난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엄밀히는 "잘난 체하는"이라는 표현이 맞겠지만.
그들은 더 많은 지식을 뱉어내고 싶어 했고, 더 많은 정보를알려주길 원했다.그 작은 무리에서조차 너도나도 1등이 되고 싶은 듯했다.
자각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그들에 비해 지식은 턱 없이 부족하고 사고의 깊이 또한 얕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들킬까 봐 스스로를 포장하기에 바빴다.가면 속에서는 긴장감이 흘러내렸고,알맹이 대신 껍데기만 남았다.
사회인이 되어 만난 우리들은각기 몸담은 회사의간판을 드높이고명함 속 이름을 뽐내느라 여념이 없었다.오랜만에 만난 동문들 사이에서 "잘지내냐"는 말은 "잘난 회사에서 지내냐"라는 의미로 다가왔고, 나도 질세라 명함을 내밀었다.
남편에게 호감을 가질 무렵,그를 둘러싼 공기에서 여태껏 다른 사람에게서느껴보지못했던 편안함을 감지하게 되었다. 성격이 둥글둥글 하지도 표정이 서글서글한 편도 아닌데, 그의 말에서는 늘 여유와 느긋함이 묻어났다.
무엇보다"모른다"라는 말을 할 줄 안다는 점이신선했다. "난잘 모르겠네. 어려워"라고 말하는 눈빛에 자연스러운 순수함이 베어 좋았다.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하는 대신 당당하게 말하는용기에 매력을 느꼈다. 그를 만날 땐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앞에서 만큼은 솔직한 나로 되돌아왔다.
잘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써온내가 그에게 이끌리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때로는그의 넉넉한 태도가 나태함으로 비치기도 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음에도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표가 낮다 못해 없는 듯 보였다. 답답한 나머지 내가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라고 닦달하면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는 말만 반복할 뿐 요지부동이었다. 매일 즐겁고 마음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모토이기에제 그릇에 맞게 살고 싶다고 했다.
굳이 등수를 매겨야 한다면10명 중에 4등이 딱 좋다며.
인생의 반환점에 이를 나이가 되면서 지금껏 살아오지 않은 방식으로 2막을 준비하고 싶어졌다. 그 출발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습성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위를 향한 시선과 뭐라도 움켜쥔 손은 잠시나마 삶의 불안을 덜어 주었지만, 진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를 다그치고 남들이 인정해 줘야 얻을 수 있는 행복이었으니까. 이런행복에는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시선을 나에게 두고 불끈 쥔 손의 힘을 풀어보니, 그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들이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아등바등 붙잡지 않았더니초조함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여유가 스미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간판이나 내세울 만한 감투는 없어졌지만 변화된 내가 마음에 들었다.
잘 나지 않아도, 위로 올라가지 않아도괜찮았던것이다. 어쩌면 내 그릇도 10명 중에 4등이 최선일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돌고 돌아 이제야 깨달았는데,남편은 시행착오 한번 없이 어떻게 자신에게 맞는 삶의 형태를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