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공항. 입국 심사를 마치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니 OO투어 팻말이 보인다. 가이드님주위를 빙 둘러싼 여행객은 시니어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데다 언뜻 봐도 대부분은 여성인 듯했다.
버스 안에서도 식당 안에서도 그녀들의 웃음과 말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7 공주파, 티격태격 모녀와 이모들, 모범생 느낌의 동창 모임 등 그룹마다 약간의 캐릭터 차이는 있었지만, 저마다의 개성과 존재감은 뚜렷했다.
한꺼번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오랜만에 타인을 관찰하는 재미를 맛 볼 기회가생겼다. 내향적 성향이 강한 나는 처음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 별 다른 말을 건네지 못하는 성격이다. 게다가 깡마른 편이라 상대방이 다가오기 편안한 인상과도 거리가 멀다. 바꿔 말하면 처음에는 존재감도 없고 호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편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 발짝 떨어져서 지그시 타인을 관찰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 과정은 마치 게임처럼 진행되는데, 어제 헷갈렸던 이들을 오늘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될 때 혼자서 조용히 쾌재를 부르곤 한다. Stage Clear!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점점 호감이 가는 인물에 시선이 꽂히게 된다. 주변의 채도는 점점 어두워지면서마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머리 위로 환하게 빛이 쏟아진다. 대체로 온화하고 배려 깊은 성향에, 단정하고 말끔한 용모를 갖춘 이들이다(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제야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물론 그 사이에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건네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내 마음이 가 닿은 그 사람들이다. 늘 그랬다. 신기하고 희한하다. 사람 사이에도 끌어당김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나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닿은 건 늘 버스 뒷 자석에 나란히 앉아 계시던 50대 중반의 부부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던 손을 꼭 잡고 다녔고, 버스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분은 가는 발걸음마다 아내를 향해 카메라를 켰다. 그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내가 비쳤고, 그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이 담겨 있었다.
여사님 중 몇몇은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말하곤 했다.
"혹시, 부부가 아닌 건 아니죠? 왜 이렇게 알콩달콩해?"
"아니면 두 번째 인가? 첫 번째가 이렇게 사이가 좋을 리는 없어."
열 살은 더 어린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 실례였겠지만, 머리에 하얀 눈이 내려앉은 여사님들의 발언은 역시 과감하고 거침이 없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고 싶은 말은 기어이 하고 만다. 사실 나도 50넘은 부부가 어쩜 저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는지 내심 궁금하긴 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이니 부부가 아니면 어떻고, 두 번째면 어떠랴. (윤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서로 사랑한다면 누구나 축복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우리 쇼윈도예요. 호호호"라고 대답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남녀의 기분 좋은 웃음이 들렸다. 공 던져 넣기 게임기(정확한 명칭은 모름) 앞에서 사이좋은 그들이 사이좋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웃음속에서 소년과 소녀가 숨 쉬고 있는 듯했다.
남편과 나는 그들을 사이좋은 커플이라 불렀다.
"사이좋은 커플 말이야. 아내분은 한결같이 상냥하고 남편분은 진짜 예의 바르시더라."
"맞아. 남편분은 누구한테나 고맙다고 인사하고. 아내분은 아침마다 잘 잤냐고 말해주셨어."
"근데 또 배려도 잘해주시지 않았어?"
"응. 사진 스폿에서도 다른 그룹에 순서 양보하시고, 맨 나중에 찍으시더라고. 식당에서도 남는 자리에 앉으셨지. 마지막 날 버스 기사님한테 선물도 주시고."
비록 일주일이었지만, 여유롭고 넉넉한 중년 부부의 품격을 경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더욱 나의 눈길을 끈 건 모든 말과 행동에서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묻어났다는 점이다. 유난스럽거나 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들만의 낭만이 있었다. 불타오르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뭉근한 우정 같은 그것.
"우리, 더 나이 먹어도 그분들처럼 그렇게 서로 아끼면서 지낼 수 있을까?"
"그렇게 살면 너무 행복할 것 같지? 친구처럼 연인처럼."
주름살이 짙어지고 백발이 성성하게 내려 앉은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변화무쌍한 인생을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곰국이나 카레를 한솥 끓여놓고 친구들과 여행 온 여사님이 아닌, 그 어디든 남편과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걷는 모습에 더 가깝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