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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Feb 09. 2024

그날 밤, 남편이 설거지를 했던 이유

때로는 말보다

아뿔싸.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목구멍 안으로 삼켰어야 하는데. 완벽한 실수였다.


그전까지 전개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명백히 남편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 쌍방이라 하더라도 의 과실이 더 크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조금 더 참았거나 지혜롭게 대처했다면 이렇게 리는 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의 경솔한 한마디에 판세는 뒤집혔고 파상공세를 퍼부으며 기세등등했던  어깨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결정력 부족은 고질병에 가깝다. 골대가 텅텅 비었는데 엉뚱한 쪽으로 로켓슛을 날려서 흐름을 내주고야 만다.


남편은 굳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서 역전 골을 넣는 스타일은 아니다. 대신, 자진 퇴장으로 경기를 끝낸다. 덕분에 널브러진 식탁 위의 안주와 싱크볼 안의 접시들을 치우는 건 내 몫이 된다.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를 가르며 그에게 존중의 마음을 담아 마무리까지 함께 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편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간다면 완벽한 나의 패배로 끝나는 게임이었다.


남편은 예상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발끝이 안방이 아닌 싱크대로 향한다. 정확히는 씽크볼 쪽이었다.


쏴~ 쏴~ 시원하게 물줄기가 쏟아진다. 이내 달그락달그락 접시들이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와 등을 진 방향으로 돌아서서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새하얀 식탁이 드러날 때 즈음, 물소리는 멈췄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씽크볼이 눈에 들어왔다.


이 많은 설거지를 단숨에 해치우는 걸 보면 확실히 그쪽에 재능이 있는 듯하다. 평소 같았으면 엄지 척을 날리며 칭찬을 백만 번 해줬을 텐데, 이날은 서로 등을 진 시간만큼 서먹해진 공기 탓에 너그러운 말 한마디를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다시 냉랭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아직 돌아선 그의 등을 바라보다, 잊고 살았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렇다. 이 사람은 산처럼 쌓인 설거지보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더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접시를 정리하느라 아직도 바쁜 그의 손은 이미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차갑게 돌아선 그의 등이 아닌,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쑥스러워서 밖으로 꺼내진 못하지만 그의 입안에서 맴돌고 있는 말들까지.


"완전 반짝반짝하네! 덕분에 개운하고 기분 좋아졌어. 그리고 아까 심한 말 해서 미안."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나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해버렸다. 자칫 전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다툼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그의 마음이 느껴지자 등이 간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먼저 사과했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산처럼 쌓인 설거지보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더 쉬운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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