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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Dec 10. 2021

남편이 한달 동안 휴가나 가자고 한다

그냥 술이 먹고 싶은거라고 말을 하소


퇴근을 앞둔 시간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위드 코로나로 사람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진 탓인지, 11월부터 만화카페에 손님이 줄었는데 12월에는 더 꽝으로 치닫고 있다. 요즘 들어 코로나 상황이 다시 심각해지면서 다들 집콕하는 건가. 코로나 시대에 만화카페를 오픈한 탓에 모든 원인을 코로나로 돌린다(남편은 지난해 조기 은퇴 실현 후 만화카페를 오픈했다).


손님으로 바글바글하던 주말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고, 남편은 카운터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 듯하다. 평일엔 드문드문 한두 명씩 손님이 들어오는 패턴으로, 식사 주문량 또한 현저히 줄었다. 식사를 하려면 마스크를 벗어야 하니 확실히 코로나 상황과 맞물려 있긴 한 것 같다.


사실 연일 코로나 확진자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손님이 많으면 많은 대로 불안하다. 적당히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정도로만 꾸준히 유지되면 좋은데 그게 내 맘대로 되었으면 이런 카톡을 날리지도 않았겠지.


근데 참 이상하다. 전혀 걱정도 되지 않고 이런 유쾌한 대화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초월한 건지 해탈한 건지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남편이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자영업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거나 부담을 갖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함께 술 한잔으로 털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술잔을 기울여줄 수 있다는 전우애마저 불타오른다.


아 잠깐만, 근데 이 사람 술 한잔하자는 구실을 만들고 싶어서 일부러 연막 치는 건가.


만화카페를 차린 이후에 확실히 술 마시는 빈도수가 늘었다. 평일의 남편은 하루 종일 혼자서 매장에 나가 있으니 이 말 외에는 그 누구와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계산해드릴까요?"


간혹 화장실이 어디냐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어디에서 볼 수 있냐고 물어보는 손님이 있다면 모를까. 말하는 법 조차 까먹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빌어 그와 대화를 나눈다.  나는 술은 잘 못하지만 남편이랑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옆에 앉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서로의 비타민이 되는 시간이기에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드링킹 하는 건 술이 아닌 행복이라며 정신승리하는 우리다.


다만, 내가 요즘 조금 들어 술 마시는 빈도를 줄여보자며 정신 차린 듯한 언행을 하니, 술을 못 마시게 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불쌍한 가장의 코스프레를 한 건가 싶긴 하다. 정녕 이 사람은 나의 측은지심을 발동시켜 오늘 하루만이라도 음주를 윤허받고자 한 것인가. 에구머니나 깜빡 속았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도 함께 놀아보세.


지난달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평소 주량을 묻는 질문에 주 1회 맥주 500cc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건 뻥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주 5일은 마시는 듯한데 그건 아마도 술이 아니라 행복이니까 그랬나 보다. 그래도 내년 검사 때는 거짓말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한 달 전쯤부터 절주를 해서 주 1회에 맞춰서 살다가, 건강검진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거짓말은 아니겠지. 완벽한 시나리오다. 그래도 주 3회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요즘 대학 등록금 엄청 비싸다던데, 이렇게 놀고먹다가 아이들 교육비는 어떻게 하지?"

"집을 줄여서 이사 가면 되지."


대화는 늘 이렇다. 아직은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이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유지하면 되지만, 아이들이 다 큰 후에는 집을 줄여서 살면 된다며 긍정 회로를 돌린다. 마침 내가 요즘 미니멀 라이프에도 관심이 많아지면서 낡아빠진 소파를 갖다 버리고 마루를 좀 더 넓게 쓰자고 제안한 적도 있으니, 소파가 없으면 마루가 넓을 필요가 없다는 데에도 생각이 일치한다. 남편은 내가 옷을 버리면 충분히 좁은 집에 살 수 있을 거라며 옷을 더 이상 사지 않겠다는 결심을 응원해주고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옷 쇼핑으로 승화시켰던 나는 앞으로 3년은 족히 버틸 정도의 옷을 가지고 있다. 올여름 옷장이 터져서 옷을 찾다가 지각할 뻔한 위기를 맞고는 더 이상 사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기존 옷들을 입다가 헤지면 하나씩 버려서 슬림화를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기 시작했으니 남편 말이 맞긴 하다.  

 

둘 다 재테크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조금씩 주식은 하고 있지만 재미를 본 적은 결코 없는 데다, 조금 맛을 봤나 싶으면 다음 투자처에서 망해버린다. 수익률은 매번 제자리를 맴돈다. 그러다 어느 날 둘 중 한 명이 10만 원이나 벌었다며 투자에 눈을 뜬 것 같다고 자랑을 해댄다. 늘 그렇듯 다음 날은 말이 없어진다. 역시 우린 돈은 잘 모른다며 술이나 먹자 한다.


날 때부터 부유한 집 자식들도 아니고, 경제관념이 철두철미한 절약의 달인도 아니며, 계획적 소비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지만(퇴사 실현을 위해 이 부분은 꼭 개선해볼 계획이다), 미래의 경제 사정을 걱정하는 대신 한가롭게 술이나 먹을 수 있는 건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일치하기 때문인 듯하다.


남들이 한다고 다 따라 하지 않고, 유행한다고 다 사지 않는다. 호텔에 가서 10만 원짜리 음식을 먹어도 그게 자랑 거리인지 모르겠고, 명품 시계나 가방을 선물 받는 것이 그렇게나 행복할까 의문이다.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소소한 재미를 찾으며 살아간다. 핫 플레이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대신, 축구를 보면서 맥주를 먹거나 야구장에 간다. 한껏 차려입고 백화점에 가서 카드를 긁는 대신 슬리퍼를 찍찍 끌고 동네 편의점 투어를 하면서 신박한 제품을 발견하며 환호한다.


아이들 사교육에도 심드렁하다. 부모 욕심에 이것저것 다 시키면서 아이들이 레벨업 하는 것,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면서까지 대회에 참가시키거나 특별한 교육을 시키는 것에는 반기를 든다. 꼭 필요한 학원만 보내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바로 중단시킨다. 대신 성적이나 실력이 떨어지는 것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주지시킨다(알아듣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그만두는 건 두려운지 좀 더 해보겠다고는 한다).


내가 직접 공부를 가르칠 때도 있다. 유명 강사들이나 학원 선생님들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내 아이들의 성향을 잘 알기에 맞춤형으로 지도한 것이 때로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대개는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건 아니고, 그냥 현상 유지 정도에 불과하다). 어쨌든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니 너무 구속하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둘이 항상 하는 말은, "돈은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욕심부리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니니까 하던 대로 하면 어떻게든 다 살아진다고.


주식은 망했고, 가게는 똥망이고, 술도 못 끊었지만 뭔가 괜찮다. 우리답게 살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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