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필 Aug 31. 2022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동학대 권하는 사회

#14 자비에 르그랑, 아직 끝나지 않았다(2017)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아이, 반복되는 아픔

5살 아이가 목검에 맞아 죽었다. 정확히는 목검으로 폭행당한 뒤 손발이 묶여 무려 23시간 동안 방치되다 사망했다. 범인은 의붓'아버지'였다. 아이가 죽은 은 아이를 계부의 학대로부터 떼어 놓기 위한 2년 간의 보호명령이 끝난 후였다. 보호 명령 전에는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졌었고, 접근 금지 조치 전에는 경찰의 구두 경고가 있었다. 학대는 아이의 사망 수년 전부터 지속되었고 경찰도 관련 기관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수많은 조치들 끝에 학대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숨졌다.


놀랍게도 학대를 당한 수많은 아이들은 결국 가정으로 돌아간다. 설령 아동학대 가해자가 폭력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일까. 아이들은 자립할 수 없다. 어느 나이까지는 가정이나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수많은 피해 아동의 양육을 감당할 사회 시스템이 부재하니, 아동학대 가해자의 교육과 처벌, 보호처분 기간이 끝나면 아이를 가정으로 돌려보낸다.(여기에는 "아이는 어쨌든 부모 밑에서 커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관습적인 생각도 한몫한다) 물론 일련의 과정으로 교화되는 가해자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 대부분의 가해 부모는 학대를 반복한다.

판사를 사이에 둔 마리암(아내)과 앙투안(남편)

영화는 양육권에 대한 법원 심리에서, 피해 아동인 줄리앙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앙투안은 판사가 편지를 읽는 와중에  담당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질책을 당한다. 앙투안에게 줄리앙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앙투안은 마리암에 대한 집착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기에, 줄리앙은 아내를 만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슬프게도 줄리앙의 의견은 판사에게도 중요치 않아 보인다. 줄리앙의 편지를 직접 낭독한 판사지만 줄리앙의 미래를 고려한다면서 부모의 경제력과 부모가 사회에서 어떤 평판을 받고 있는지 등에 더 집중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리암이 아이들을 세뇌했기 때문'이라는 앙투안의 터무니없는 주장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많은 사건들을 접할 때 마치 영화 속 판사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양쪽의 의견을 공정히 들어보고 어느 쪽이 '옳고 합리적인'지를 판단한다. 그 판단의 기준은 경제력일 수도 있고 교화 가능성일 수도 있고 가해자의 평소 성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이의 의견은 쉬이 묵살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세뇌로 인해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거나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치부되기 십상이다. 피해 당사자인 아이의 의견보단 사회가 설정해놓은 기준로 아이의 행선지가 정해진다.


대부분의 도착지는 아이의 몸에 수많은 상처를 남겼던 가해 가정이다.



체험으로 인식을 바꾸다

법원 심리 결과, 격주에 한 번씩 줄리앙이 앙투안을 만나게 되면서 가정폭력의 악몽은 되풀이된다. 처음 잠깐은 앙투안이 줄리앙과의 시간에 공이 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학대의 기억으로 앙투안을 적대시하는 줄리앙이 비협조적 태도를 취하자 앙투안은 격분하고, 줄리앙이 앉아있는 카시트를 주먹으로 수차례 내려치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또한 줄리앙에 협박과 회유를 통해 가족들이 몰래 이사한 집을 알아낸 앙투안은, 단지 방문만으로도 가족들을 불안에 떨게 한다.


가족들(피해자)에겐 앙투안(가해자)의 존재 자체가 공포다.


줄리앙과 앙투안, 줄리앙에게 앙투안과 함께인 차 안은 공포의 공간이다.


가족들의 불안은 마리암의 딸인 조세핀의 불안한 얼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조세핀은 어려서부터 앙투안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지금은 성년의 나이가 되어 더 이상 앙투안을 만나지 않아도 되지만, 항상 앙투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생일파티에 앙투안을 만나러 갔던 줄리앙을 발견하자, 본능적으로 앙투안이 근처에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조세핀은 상당히 불안해한다. 노래를 부르는 중에도 초조하게 흔들리는 조세핀의 눈동자는 학대 피해자들의 끝날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학대 가정의 불안은 결국 앙투안이 총을 가지고 마리암의 집으로 들이닥치면서 심리적 불안에서 실제적 공포로 확장된다. 마리암과 줄리앙은 앙투안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 문을 잠그고, 총을 맞지 않기 위해 욕조에 몸을 숨긴다. 어쩌면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의 피해자에게 허락된 공간은 욕조만큼의 아주 작은 공간이다.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그렇다.


가해자가 언제나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좁디좁은 공간에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것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어떤 설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피해자의 불안과 숨 막히는 상황에 관객들을 몰아넣고 그저 체험케 한다. 답답하면서도 강렬한 체험은 삽시간에 우리의 인식을 전환시킨다. 직접 겪는 것에는 비할 것이 못되지만 보여주는 것을 통해 단순히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을 더욱 강력하게 마음에 닿게 한다.





슬프게도 아동 학대는 숱하게 발생하고 가정폭력은 지난히 반복된다. 사회의 아픈 단면들이 반복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미흡한 시스템과 잘못된 인식은 피해 아동을 계속 같은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에 대해서 어떠한 시선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 속 판사처럼 진짜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편협한 시각으로 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를 통해 학대 피해자들 고통을 체험하고도, 상처 입고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의 기사를 접하고도, 여태 팔짱을 끼고 옳고 그름의 정도만을 재단하고 있기에, 우리 사회에서 학대 피해 가정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난해도 나답게 살 수 있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