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아이를 키운다는 것

도움을 청하지 않는 아이

by 고요한 빛

우리 아이는 원하는 것이 확실한 아이다. 친구가 여러가지 맛 사탕 중 하나를 골라보라고 할 때도, 내일 뭘 입을지 물어봐도,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물어봐도, 마치 이미 오래 전에 결정을 해 놓은 듯 1초만에 답변이 나온다. 너무 금방 답변이 나와 제대로 생각했나 싶어 재차 물어봐도 번복하는 법이 거의 없다. 이렇듯 또렷한 아이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자신에 대한 확신, 자신감, 이런 것들이.

5살이 되어 유치원에 들어간 첫 해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OO이는 유치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요. 신체활동, 소근육활동 전반에서 주어진 과제를 곧잘 해내고요. 교사가 매일 새로 소개하는 몬테소리 교구도 그날 바로 한 번씩 시도해본답니다. 친구와도 잘 놀고 갈등이 있을 때도 잘 조정하며 지낼 줄 알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아이가 예민한 편이어서 그전에 어린이집 적응이 쉽지 않았던 터라, 유치원 첫 해에 이런 얘기를 듣고 한시름 놓았던 기억이 있다. 어린이집 시절, 거의 매일 아침마다 눈물로 범벅된 안쓰러운 얼굴과 엄마 손가락을 있는 힘껏 쥔 보드라운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옮기는 발걸음은 어쩔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유치원에 가면서부터는 가기 싫다는 얘기는 여전히 종종했지만, 그 사이 좀 큰 것인지 예전만큼 울지는 않았다. 면담 때 선생님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후 시간이 흘러 아이가 같은 유치원 6살 반으로 올라갔고, 1년에 두 번 있는 정기 면담을 위해 어느 가을 날 유치원에 방문했다. 그동안 있었던 정기 면담 때마다 아이가 무난히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기에, 이번 면담 때는 할 질문도 예전처럼 촘촘히 준비하지 않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전반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아이가 선생님한테 표현을 많이 하지 않아서 집에서는 유치원 생활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마침 나도 유치원 생활에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운을 뗐다. 아이가 요즘 교구 활동을 안 하고 싶다는 얘기를 집에서 자주 한다고. 그러자 선생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신다. “OO이는 요즘 교구 시간에 보통 자기가 예전에 했던 것, 그리고 하기 쉬운 것 위주로 고르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친구들과는 활발히 소통하지만 선생님들한테는 거의 먼저 말을 걸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아요.”

아이의 유치원은 몬테소리 교구 활동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발달과정에 맞춰 선생님들이 교구를 소개하고 비치해주신다. 아이들은 매일 2시간 정도씩 자율적으로 소개받은 교구 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 교구 활동을 한다. 예전에는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몬테소리 교구를 선점하기 위해 셔틀버스를 안 타고 1등으로 도착하고 싶다며 빨리 데려다 달라고 할 정도로 교구 활동을 좋아했는데, 몇 달 전부터는 교구시간이 싫다고 얘기하며 스트레스까지 받고 있어서, 왜 그런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아이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재미가 없다고 간단하게 답할 뿐이었고, 혹시 어려운 부분이 있냐고 물어보면 너무 쉬워서 재미없다고 대답하곤 했다. 뭔가 허세가 껴 있다고는 느껴졌지만, 5살부터 했던 교구활동이었기에 잠깐 지겨울 수도 있지 하며 넘겼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지겹거나 시시한 것이 아니라, 교구 난이도가 올라감에 따라 자신감이 줄어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고보니 면담 한 달 전쯤에, 아이가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 교구 두 가지가 있다고 얘기를 툭 꺼낸 적이 있었다. 친구와 그 교구를 같이 하는데 친구가 하는 말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알고 싶고 궁금한데 친구가 설명해줘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친구는 알고 있는데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만들어내는 무능감, 친구가 설명해줘도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기력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교구가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면 집에서 같이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아이가 말한 두 가지 교구 중 하나는 아이 설명만으로 어떤 교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어 집에서 간이로 카드를 만들어 해보았다. 그 교구는 친구와 둘이서 함께 하는 게임 교구였는데, 한 명이 네 자리 숫자의 각 자리 별로 0에서 9까지의 숫자 중 하나를 골라 랜덤으로 네 자리 수를 만들고 그 수를 읽으면, 나머지 한 명이 친구의 말을 듣고 네 자리 숫자를 숫자카드로 완성한 후 친구가 들고 있는 숫자와 일치하는지 확인해보는 교구였다.


수교구1.jpg 집에서 아이와 같이 만든 숫자카드
수교구.jpg 엄마가 스케치북에 숫자를 적고 읽으면, 아이가 그 숫자를 듣고 숫자카드를 이용해 네자리수를 만든다. 아이가 완성하면 엄마가 적은 숫자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아이와 같이 해보며 생각을 들여다보니, 아이는 두 자리 수 이상의 숫자 개념은 있었지만 문자로서의 숫자를 읽는 원칙을 알고 있지 못했다. 20을 ‘십이’로, 30을 ‘십삼’으로 읽고 있었다. 20은 10이 2개인 것이고, 30은 10이 3개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리고 차례대로 숫자를 셀 때는 ‘십구’ 다음엔 ‘이십’이라고 말했지만, 문자로 된 숫자를 읽을 때는 20은 10이 2개이니까 ‘십이’라고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친구가 말하는 네 자리 수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10은 보통 ‘십’이라고 읽지만 원래는 ‘일십’인데 ‘일’을 생략해서 말하는 것이어서 사실 ‘일십’이고, 같은 맥락에서 20은 ‘이십’, 30은 ‘삼십’이라고, 10이 몇 개인지는 ‘십(10)’ 뒤가 아닌 앞에 붙여서 읽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100도, 1000도 마찬가지로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아이 얼굴에 깨달음의 희열이 번졌다. 마치 눈 앞의 물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희뿌옇던 시야가 일순간 거두어지고 선명한 색상이 가득한 세상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처럼, 이렇게 숫자에 정갈한 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그 깨달음이 있은 후에 아이는 거의 한 시간을 계속해서 나에게 네 자리 수 문제를 내달라며 재촉했다. 그 깨달음이 너무 즐거워 계속해서 써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는 친구와 그 교구를 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모르는 친구에게 알려주기도 했다고 뿌듯하게 얘기하곤 했다.


그 교구 말고 아이가 하는 법을 모르겠다는 나머지 하나의 교구는 아이의 설명만 듣고는 전혀 어떤 교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여쭤보라고 하자 아이는 “선생님은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거나 다른 할 일이 많으셔서 물어볼 수가 없어.”라고 답했다. 마치 선생님께 물어보는 것은 선택이 불가능한 선택지인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때 나는 무심히 ‘단체생활을 하면 그럴 수도 있지’, ‘자기가 답답하면 물어보겠지’, ‘어떻게 항상 뭐든지 잘하겠어. 못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지’ 하고 넘겨버렸다.


선생님은 덧붙여 말씀하셨다. “OO이가 교사한테는 말을 거의 먼저 안 해요. 일상적인 시시콜콜한 얘기를 교사에게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OO이는 그런 얘기도 먼저 잘 안 하고요. 좀 힘든 점이 있을 때도 교사가 발견하고 물어보면 대답하는데 먼저 힘들다고 좀처럼 얘기하지 않아요. 유치원 활동에 대한 참여도나 열의는 높은 편이고 친구들이랑도 활발히 잘 노는데, 교사한테 어려운 점을 잘 털어놓지 않으니 집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나 궁금했어요.”


그제서야 단편적인 아이의 말만으로는 완전한 모습을 그릴 수 없었던 아이의 마음 속이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듯 분명해진다. 아이가 ‘교구시간이 재미없다, 너무 쉬워서 재미없다, 하기 싫다’는 말은 ‘교구활동을 하면 내가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서 그 시간을 마주하기 불편하다’라는 말이었을 수 있겠다는, ‘선생님은 바빠서 물어볼 수 없다’는 말은 ‘나는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부족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닿는다.

나는 무엇이든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느끼고 습득해야 진짜 아이의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험들이 아이를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이다.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그 경험들을 온전히 다 몸으로 받아내기에 아이는 아직 많이 연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을 계속 해나가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내 행동의 주체는 나’라고 느끼는 ‘자율성’을 갖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유능감’과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관계성’이 아이를 든든히 뒷받침해주어야 했다.


아이가 자신이 잘 모르는 주제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얘기할 때는 다급할 만큼 명확하고 날카로울 만큼 강한 어투였던 것이 떠오른다. 내가 보지 못했던, 유치원에서, 잘하는 친구 옆에서 위축되고 무력했을 아이의 모습이 그려지자 왜 그런 말투로 얘기했는지 알 것 같다. 뚫기 어렵게 느껴질 만큼 단단하고 확고한 그 말투 덕분에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다행히 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가려져 있던 아이의 연약한 속마음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도 된다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오히려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선생님은 그래도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아이의 확고한 부정의 말들은 사실 ‘나도 잘해내고 싶다’는 갈망의 또 다른 형태였음을 이제야 안다. 아이가 조금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수준의 작은 과제들을 제공해줌으로써 점진적인 성공을 경험하게 하는 ‘지지대’로서의 부모의 역할이 필요했다는 것을 미안하게도, 부끄럽게도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 아이가 자신이 없어 강하게 외면하는 것들을, 내가 정면으로 마주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지지대’를 찬찬히 놓아주려고 한다. 아이가 어려움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기를,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이 글과 이어지는 연구 함께 보기>


1. 자율성만으로는 아이를 단단하게 만들 수 없다.

자기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아이가 건강한 동기와 안정된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자율성(autonomy)뿐 아니라 유능감(competence)과 관계성(relatedness)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Niemiec & Ryan, 2009)

연구들은 자율성이 강조되더라도, 유능감과 관계성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이가 실패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거나 도전적인 과제를 회피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Wang et al., 2019)


2. 아이들은 ‘도움 요청’을 무능력의 신호로 인식하기도 한다.

아동·청소년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은 대략 초등 저학년 시기부터 질문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을 ‘못하는 아이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교사나 또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모르는 상태로 버티거나 쉬운 과제만 선택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Kauchak & Eggen, 2022)

도움 요청이 자존감 손상이나 평판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느낄수록, 아이는 학습 기회를 놓치고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Won et al., 2024)


3. 적절한 지지대와 작은 성공은 유능감을 회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자기효능감 이론에 따르면 “나는 하면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직접 경험한 작은 성공에서 가장 강하게 형성된다. 반복된 실패보다, 잘게 쪼갠 과제를 성공해 나가는 경험이 아이를 다시 세운다.(Bandura, 1997)

과제를 아이의 현재 수준에 맞게 나누고, 적절한 설명과 도움을 제공해 성공 경험을 축적하게 하는 스캐폴딩(scaffolding)은 자기효능감과 과제 지속성을 높이는 것으로 보고된다.(Vygotsky, 1978; Wood et al., 1976)


4. 관계적 안전감은 실패 이후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겉으로 성취도가 높고 자신감 있어 보이는 아이들조차, 비교와 평가가 강한 상황에서는 도전 회피나 도움 회피를 보일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다.(Guay et al., 1999)

아이는 실패 경험 그 자체보다 실패 이후에도 지지받고 있다는 감각을 가질 때 자기개념과 자존감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Orth et al., 2019) 이는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관계적 안정감이 아이의 도전과 회복에 중요한 기반이 됨을 시사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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