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맛으로 채우는 자취방 냉장고
‘딸은 예쁜 도둑’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도 정의가 되어 있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딸은 키울 때나 출가한 후에도 아들보다 더 돈이 들고 친정집 세간도 축내지만 딸에 대한 애정이 커서 그것이 도리어 예쁘게만 보인다는 말.’이라고 한다.
집을 떠난 지 벌써 11년 차. 고등학교 기숙사를 거쳐 자취생으로는 8년 차이다. 초반에는 서울로 상경해 새로 만난 친구들과의 약속도 많았고, 집에서는 대부분 잠만 자는 생활을 했다. 먹는 것도 컵밥 같이 가장 싼 탄수화물. 조그만 원룸이라 부엌은 더욱 작아 본가에서 처럼 다채로운 요리를 하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요리를 꽤나 뚝딱뚝딱 잘하는 편이었는데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내려가면 엄마는 김치, 소분한 고기, 채소, 반찬 등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바삐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냉장고가 작아서 어차피 안 들어간다며 필요 없다고 엄마를 만류했다. 엄마는 계속 가져가라고 하고, 나는 거절하니 티격태격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 결국은 내가 이겨 다 빼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캐리어를 열면 한쪽에 엄마가 숨겨 놓은,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반찬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티격태격은 없어졌다. 오히려 지금은 미리 전화해서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
“엄마, 감자랑 양파랑 대파 다 손질해서 싸줘!”
도둑도 이런 고약한 도둑이 없다.
자취생활이 길어지고, 한 동네에서만 지내다 보니 자주 가는 식당도 거기서 거기. 먹는 것도 거기서 거기가 되었다. 집밥은 매일 비슷하게 먹어도 질리지 않는데, 나가서 먹는 음식은 특유의 강한 맛 때문에 금방 질린다. 꽤나 맛집이 많은 동네에 거주하는데도 8년째 살다 보니 이제 나가서 먹기가 꺼려진다. 그럼 별 수 있나. 직접 해 먹어야지. 원래도 가끔씩은 요리를 했던 편이라 기본양념 등 구색은 갖추어 놓고 살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물가가 비싸도 너무 비싸다. 얼마 전에는 마트에 갔더니 애호박이 하나에 3800원이었다.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마트는 그 반값 정도긴 했지만, 요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지방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더 크게 느껴진다. 싸게 구매하려면 시장에 가거나 대용량으로 구매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자취생용 작은 냉장고라 효율도 떨어져 가정용 큰 냉장고들처럼 오래 신선하게 보관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싸게 소분된 재료들을 구매한다.
최근에 엄마와 카레를 해먹은 이야기를 했는데, 주먹만 한 깐 감자 하나를 1000원에 샀다고 하니 엄마가 엄청 놀랐다. 사실 1500원이었는데 엄마가 놀랄까 봐 줄여말 한 건데도 말이다. 엄마는 요즘 우리 집에서 가까운 할아버지 댁 근처에서 우리 가족이 먹는 용도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이번에 감자를 많이 수확했다면서 감자 하나에 1000원이면 엄마 엄청 부자라고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채소들도 너무 비싸고 과일도 잘 안 사 먹게 된다고 하니까 이번에 집에 올 때 많이 가져가라고 했다.
엄마가 잔뜩 싸주는 건 좋은데, 보관이 걱정이었다. 금방 상하는 자취방 냉장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진공포장기를 하나 사줬다. 이번에 진공포장기를 가지고 내려가기로 했다. 가서 엄마랑 감자, 양파도 다 까고 손질해서 진공포장을 해오려고 말이다. 아예 조그마한 아이스박스에 아이스팩까지 챙겨가기로 했다. 소중한 금채소님들을 신선하게 모시기 위해서! 대신 서비스로 진공포장용 롤팩도 많이 챙겨가서 집 냉장고 정리를 내가 해주기로 했다. 엄마도 엄마만의 룰이 있겠지만, 내 눈엔 정리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참기름, 고춧가루. 지금까진 비싼 줄도 몰랐는데 밖에서 사려면 엄청 비싼걸 이번에야 알았다. 얘네들도 엄마한테 이번에 챙겨달라고 했다. 이렇게나 당당하고 고약한 도둑인데도 엄마는 내가 처음으로 이러니 좋은가보다.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반찬은 뭐를 해놓을지 계속 묻는다. 나는 거절도 안 하고 좋다고 이것저것 더 싸 달라고 한다. 앞으로도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안 그러진 않을 것 같다.
“대신 내가 돈 벌면 용돈 많이 줄게!”
“됐으니까 잘 챙겨 먹기나 해~”
엄마 눈엔 내가 도둑이어도 예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