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밤은 묵묵히 익어간다

세이스강의 1539번째 자작시

by 세이스강 이윤재

공주의 밤은 묵묵히 익어간다 / 세이스강(이윤재)

간밤에
눈 내린 듯 정적이 내려앉네
삶은 생밤으로 시작되었지
껍질이 얇고 속은 연한
햇살에도 놀라고 바람에도 울던 시절이 있었네

맛밤처럼 단 하루를 꿈꿨다가
꿀밤 맞듯 따끔한 사랑도 받았지
눈물 삼킨 묵(墨)밤엔
아무 말도 없이 어둠만 퍼졌고

누군가는 나를 군밤처럼
불 위에 올려놓았지
달달하다며 웃던 그 손길
내 속은 타들어 갔네

찐밤이 되어서야 알겠더군
속을 꽉 채우는 건 고요한 인내였다는 걸
껍질 벗기기 전까진 누구도 몰라주었지

공주 알밤처럼 단단히 품은 내 시간
때로는 쓰고 때로는 달지만
이 생(生)은 결국
스스로를 익히는 일이라네

묵묵히 익어가는 밤
그 속에서 다시 한 번
날 껴안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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