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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석 Jan 29. 2023

땔감

그래도 내가 읽는 이유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읽을만한 좋은 책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라고. 일단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두 권 읽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니까요. 역사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담는 책은 파도와 같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독특한 사유를 담거나, 축적된 사유를 깊이 있게 담아내어 큰 궤적을 남깁니다. 파도가 몰아칠 때는 좋은 책을 읽기 벅차하다가 어쩔 땐 책가뭄이라고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일 년에 수천 권이 새로 나오는 시대에 책가뭄이란 사실 있을 수 없지만 어쩌면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과 여력이 부족해서 상대적인 책가뭄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생각은 불과 같습니다.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려면 책을 땔감으로 삼아야 합니다. 불을 지피려고 구매한 책이 젖은 땔감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빨리 타버려서 부리나케 다른 땔감을 찾아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책가뭄이라는 생각이 들고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과 여유가 없어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명작 고전을 읽는 것입니다. 이미 알려진 명작들은 마른 장작과 같아서 오랜 시간 불꽃을 유지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책이 읽히지 않아서 잊히고 절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시 출판되는 책들을 보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오랜 생명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의 불꽃을 살려주고 유지해 주는 책이니까요. 오늘도 좋은 땔감을 찾아서 나설 시간 좀 내봅시다.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22  

   

젊은 시절 침을 잔뜩 묻혀가면서 읽었던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고 싶었던 차에 소장용 책이 나왔습니다. 특정 서점(교보)에서만 팔고 있지만 찾아서 구매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런 소장용 책은 선물과도 같습니다. 자칫 책을 떨궜을 때 제본이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주로 집에서 조심스럽게 책장을 다시 넘겼습니다. 난해한 추리소설은 결말을 알고 있으면 읽는 재미가 반감하지만, 다행히 읽은 지 30여 년이 지나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몇 년 전 작가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오래된 책이라서 책장에서 없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듯이 때맞춰 소장용 책이 나와주었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그와 별도로 프랑스의 메디치 상, 이탈리아의 스토레가 상 같은 권위 있는 문학상의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별로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유감스럽게도 이 두 권위 있는 문학상의 명성이,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 한 권의 명성에 못 미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가히 만 권의 책이 집약된 결정체로서, 독서량이 많은 독자일수록 이 책이 암시하고 있는 책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거꾸로 이미 『장미의 이름』을 읽은 독자는 독서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이 책에서 한 번 보았던 부분을 재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이 책을 「책 중의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수학의 위로』 디플롯, 2022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던 수학에 관한 책을 나이가 들어서도 찾을 줄은 몰랐습니다. 자신 없던 분야를 책으로 보충하고 싶은 막연한 욕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0여 페이지에 저자가 이 정도의 내용을 넣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는 경이로웠습니다. 수학에 대한 어려운 내용을 제가 몰라서 느꼈을 수도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수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 화가들의 그림 속에 담긴 기하학의 이야기부터 건축물의 타일 패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먼저 관심을 끌고, 중반부와 후반부에 수학에 관한 이론들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지만 본인이 겪었던 비탄의 아픔과 그 아픔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었던 수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전공인 기하학을 통해서 자신의 지각 방향을 돌릴 수 있었고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던 비탄의 아픔을 조금씩 무디게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자에게는 비탄을 이겨낼 수 있었던 매개가 기하학이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수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흐에게는 음악이, 고흐에게는 미술이 그런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요? 수학을 통해 아픔을 이겨낸 저자의 수학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있었고,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수학과 문학의 만남이 독특한 감성을 전하는 지나칠 정도로 개성 넘치는 책입니다.     



매일 괜찮은 척 살아가는 당신에게』 다연, 2022     

<정작 자신은 홀대하면서 타인에게만 잘하는 당신 / 고마워, 그처럼 바쁜 와중에도 직접 나에게 상처를 줘서 / 손에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누구나 못이다 / 인생에서 맞부딪치는 절대다수의 난관은 주관 없이 남의 장단에 춤추느라 생겨난다 / 순수하다는 것은 아는 게 적다는 뜻이 아니라 지키는 게 많다는 뜻이다>. 책의 소제목 중 몇 개를 골라봤습니다. 이런 소제목만 따로 모아서 봐도 힐링이 되는 내용이 많은 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시작하기도, 해나가기도, 끝내기도 어렵고, 삶 대부분은 역경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는 대개 세상의 평가와 남의 시선에서 비롯됩니다. 이 책은 총 27장에 걸쳐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 고난과 고민이 많은 인생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재미있게,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해 줍니다. 하루에 한 꼭지만 읽으면 기분 좋은 한 달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감정을 다스리는 기술이나 노하우를 알려주기보다는 그 상황에 맞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결국 새삼스레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 녹록지 않은 이 세상에서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그러나 어떻게든 있는 힘껏 살아가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꼭 펼쳐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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