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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래하는 한국 여자 May 28. 2021

20. 한국 여자 앞에서 차도르를 벗은 여자 1

" 노래하고 싶어요! "

4년 전 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있었다.

학교 음악 교사, 호텔 연주, 행사 연주, 피아노, 노래 개인 지도가 내가 하는 일이었다.


왜 거기 갔는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3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난 재수를 해서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그 당시 in 서울 대학 들어가기가 거의 별따기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장학금도 받고 열심히 대학 생활하던 중 내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다. 음주 운전자의 미숙이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수술 후 내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셨다. 몇 주만에 세상 모든 게 달라졌다.  후 술병을 볼 때마다 울컥해져 보기조차 싫어했다. 술이 내 어머니를 데려갔다고 생각해 눈으로 보지도 마시지도 옆에 가지도 않았다.


 내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을 잃는 것 같은 슬픔과 공허감이었다. 내 나이 만 19세였다. 밥알 씹는 게 돌 씹는 맛이었다. 혀로 음식물을 넘기는 것이 죄스러웠다.


  난생 처음 내 눈으로 삶을 마감한 사람을 봤다. 그게 왜 내 어머니였을까 화도 나고 혼란스러웠다. 대학이란 걸 들어가고 싶어 미치게 공부했고 부모님 기쁘게 위해서라도 대학 장학금을 받았다. 근데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내가 여태 남들을 안 둘러보고 산 것을 알아차렸다. 왜 내 엄마에게 다정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못 했을까... 식물인간이 되어 섞은 냄새가 나는 엄마 귀에 대고 사랑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 후 3년을 매일 밤 운 것 같다. 울기를 반년 정도 했을 때 갑상선을 앓게 되는데 증상이 매우 심각했다. 항상 체력이 좋았던 나였기 때문에 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서울 대학 병원에서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를 다섯 차례 받았다. 치료 때마다 머리카락을 다 떨어져 나가고 흰머리가 나고 몸무게가 20kg 늘고 기운이 없어 누워 있었고 깨질 것 같은 두통이 한 달 내내 갔다. 수면 자체가 힘들었다. 대학을 일 년 휴학하고 있었는데 내 앞날들이 캄캄했다. 전공이 성악인데 당담 의사는 갑상선 제거 수술을 권유했다. 쉽게 말하면 전공 때려치우고 수술 후 목소리 허스키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고생 그만해라... 뭐 그런 말이었다.


 수술 목 부위는 목걸이를 하면 수술 흔적을 감출 수 있다고 말했는데 내가 똥고집을 부려 수술 대신 방사성 동위원소를 다섯 번 받았다. 암환자들과 같이 줄을 서서 순서대로 암실에 들어가서 동위원소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때 암환자들을 정말 많아 봤다.  병원에,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런 나의 경험 때문에 내가 원했던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몇 년 후 난 갑상선 항진증에서 저하증으로 바뀌었고 약만 복용하면 되는 상태로 살게 되었다. 후유증은 계속 지금도 있는데 이젠 정상인에 가깝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우린 모르고 산다. 요즘은 고령화 시대라고 하나 각종 질병과 사고로 일찍 세상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고령화라 예전보다 오래 살지만 만약 허송세월 산다면 그것도 별로다. 자기 출세만 아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수년을 암환자들만 봐서 그런지 난 다짐을 하게 된다. 꼭 내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내 인생 잠시라도 하자.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1로 정했다. 그것이 내가 파키스탄에 가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서 음악교육을 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다. 대단한 실력은 없지만 주저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2017년 봄날쯤 한 50대 초반 부유층 여자가 내게 전화를 했다.

흔히 파키스탄은 최빈국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맞다. 2018~2019년 기준 GNP 1350달러라고 한다. 근데 상류층의 삶은 상상을 초월한다.

내가 개인지도했던 파키스탄 부유층 자녀는 일 년 네 달 정도는 외국 가족 여행으로 출국한다. 보통 2~3개국을 돌다 온다. 집이 국내에도 궁전 같은 곳이 여러 개에 외국들에도 있다. 수영장은 기본이고 집에 일하는 사람들만 10명 있는 집들도 있었다. 집에서 코끼리와 낙타, 호랑이 키우는 부유층들도 봤다.

근데 하층민들의 삶은 열악하다. 카스트제도는 힌두교에만 있다고 하지만 파키스탄에도 그 잔재가 사회에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이슬람 수니파가 주를 이루지만 여성들의 삶은 쉽지 않다. 부유층 여성들은 많이 개방적이며 풍요롭게 살며 외국 여행이나 유학도 많이 간다. 하지만 역시 이슬람 사회의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같은 여자로 느꼈다.


 제일 크게 힘든 것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게 제한되어 있다. 음악 레슨을 원한다는 50대 초반 부유층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50대 초반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아름다웠다. 아주 흰 피부를 하고 있었고 말과 행동이 매우 세련된 여자분이었다.

 

참고로 부유층 여성들의 옷차림 사진들을 보자.

 결혼 전 맨디 데이 노란색 의상

결혼식 사진, 붉은색 계통의 옷을 결혼식 의상에 많이 입는다.

각종 연회복으로 입는다.

보통 평상복을 이런 식으로 입는다.

             (모든 사진은 상업적 의상 광고 사진들)


 그 여자분은 내 레슨실에 오자 차도르를 내렸다.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라 나도 깜짝 놀랐다. 목소리도 매우 다정다감했고 예의 바른 자태와 대화로 그분이 살아 온 삶을 첫 만남에서 대충 느낄 수 있었다.


" 노래를 하고 싶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유치원 때 무리로 불러 본 노래가 그녀 인생에선 전부라고 했다. 그분의 이런 결정은 큰 것이었다.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시종들의 눈치까지 살펴야 했다. 시어머니는 종교적인 분이라 집에서 음악 소리를 싫어하시고 조용하게 있는 것을 원하셨고 항상 하루 다섯 번 수라(이슬람 기도문)를 외우고 기도하시는 삶이셨다.


 남편분은 뜬구름 같이 아내가 갑자기 음악 레슨을 받고 싶다고 외국여자 선생님한테 슨 받으러 간다하니 반신반의한 생각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신 것 같다. 또 다른 눈치는 시종들이었다. 그분의 집에 가보니 시종들이 많았다. 5~6명쯤 있었는데 노래나 피아노 연습 시 그들이 듣는 것을 그 여자분은 싫어하셨다. 무슬림 중에선 아직도 음악을 비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여성이 음악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하층민에 속하는 천한 여성의 지위로 내려보는 경향까지 있다. 해서 그 여자분은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는데도 레슨을 감행했다. 그분이 내 레슨실로 올 때도 있었고 사정이 있으면 내가 찾아가는 날들도 있었다. 피아노 기초를 배우면서 발성과 노래를 하자고 내가 제의했다. 서양 12 음계를 사용하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 발성 연습부터 음정 문제를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만났다.  


 그 여성분의 집은 세계 여러 나라 여행 때 산 집 장신구들이 많았다. 특히 부자들은  집 건축을 집 건축 디자이너와 하는데 집주인 의사를 많이 반영한다. 해서 그 가족이 외국에서 사 온 거대한 집 천장 목재 조각 장신구, 명품 가구들이 많았다. 어떻게 그 큰 물건들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갖고 왔는지 모르겠다. 디지털 피아노를 한 대 샀다. 그 흰색의 디지털 피아노 외장을 더 멋있게 목재로 치장하느라 그 여성분은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평생 집 건축, 집치장, 정원 꽃과 나무 관리, 자녀 교육과 시어머니, 남편 챙기다 보니 50이 되었는데 혼자 뭔가 일구고 싶다고 했다.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그런 여성의 삶의 얼마나 많은가. 우린 조심스럽게 레슨을 시작했다.

  우린 친 자매처럼 친해졌다.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그 여성분은 정말 유치원 학생처럼 작은 것을 배워도 눈을 반짝이며 신나는 목소리로 기뻐했다. 그 여성분이 행복해 보이니 나도 행복했다.


 그렇게 두 달쯤,  그 여성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안 식구들이 피아노 소리와 가끔 나오는 노랫소리를 영 싫어하는 눈치라 쉬어야겠다고 했다. 난 그 여성분이 우렁찬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그분만의 영혼을 호흡에 실어 노래하는 기쁨을 나누길  희망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모든게 4년 전 일이다. 그 치장된 흰 디지털 피아노는 지금 그 여성분 집에 있을까?

혹시 자신을 찾는 작은 취미라도 생겼을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같이 시도하려고 했던 기쁨들을 아직도 기억할까?


  ( 파키스탄 참고 사항 )

출처: 다음 지식




파키스탄 인종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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