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간호사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눈 이야기
신규 간호사의 첫 출근 날이라고 해서 병원이 한가했던 건 아니다.
언제나처럼 아침 인계는 숨 가쁘게 흘렀고, 각자 본인의 환자를 보러 스테이션을 빠져나갔다. 나 역시 환자들을 챙겨야 했지만, 오늘은 프리셉터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나를 붙들고 있었기에 조금은 다른 입장이 되었다.
신규 간호사, 그녀는 병동 한쪽에 조심스레 앉아 있었다. 표정은 긴장되어 있었고, 손에는 병원에서 나눠준 OT 일정표와 실무 지침서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OT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병원에서 말하는 OT는 말 그대로 가벼운 소개 정도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교육은 바로 시작이다. 인계 끝나자마자 시간을 쪼개가며 그녀를 데리고 움직여야 했다.
“지금부터 병동 한 바퀴 돌면서 설명드릴게요. 워낙 정신없을 수 있어서, 모르는 건 언제든 다시 물어보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설명을 잘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막상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니,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예전에 신규였을 땐 이 모든 게 새로웠고 낯설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설명하려 드는 순간 자꾸 마음 한편에서 ‘이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흘러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런 기준이 생기고, 그런 기준에 맞춰 설명을 줄이거나 빼먹을까 봐 내심 조심스러웠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실무부터 보여주기로 했다.
“여기 있는 게 주사기들이에요. 1cc, 3cc, 5cc, 10cc, 20cc까지 있고, 위치는 사이즈별로 정리돼 있어서 자주 보면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약제 캐비닛을 열어 약들을 보여주며, 자주 처방되는 종류도 알려줬다.
“이건 항생제, 이건 수액.. 우리 병동은 시술 전·후로 진통제나 항생제, 진정제류 처방이 많아요. 미다졸람이랑 프로포폴은 특히 내시경 시술 때 자주 써요. 평일엔 쓸 일이 별로 없지만, 주말에 응급하게 내려야 하는 경우엔 여기서 꺼내서 사용하고 채워 놓는 식으로 하기도 해요.
"그리고 정맥수액은 대부분 처치실에서 준비하지만, 간단한 거는 그 자리에서 세팅할 일도 많고요.”
그러면서 수액 세트도 함께 보여주며, 수액줄, 필터, 주입속도 조절, 연결 방법 등 실무적인 설명도 곁들였다.
“처음엔 손이 어색하겠지만, 직접 만지면서 익히는 게 제일 빨라요.”
그 사이 동기 한 명이 스테이션을 지나며 장난스럽게 한 마디 건넸다.
“오~ 네가 이렇게 자상한 면이 있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어정쩡하게 웃었지만, 마음속엔 묘한 감정이 지나갔다.
내가 자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역할을 맡았기에 애써 설명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나 역시 설명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설명하는 말을 누가 어떻게 들을지에 늘 신경이 쓰였다. 그런 말 한마디가 농담인 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뻣뻣해졌다.
“아니야, 원래 이렇게 다 설명해줘야 해. 이것도 안 알려주면 나중에 꼭 헷갈려하거든.”
그렇게 대꾸하고는 다시 그녀 쪽을 돌아봤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내가 얼마나 보이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실감했다. 이전까지는 나 혼자만 알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간호사가 되어 있었다.
우리 병동은 소화기내과 병동이었다. 검사와 시술, 입퇴원이 많고 환자 회전율도 높다.
게다가 보호자가 상주하지 않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 병동이라 식사 보조부터 기저귀 교환, 자세 변경까지 간호사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단순히 약을 주고 경과를 보는 것만으로는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응급 상황은 지금은 조용해서 없을 것 같아도 자주 있어요. 간혹 시술 후에 출혈이나 합병증 오는 경우도 있어서 모니터링은 꼼꼼히 해줘야 해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이어갔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내가 말하는 걸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집중력이 느껴졌다. 그 눈빛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너무 많은 정보를 주는 건 아닐까, 이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겹쳤다.
오후엔 내시경실, 영상의학과, 약국 등 부서들을 둘러보았다. 각 부서에서 잠깐씩 담당 선생님께서 나와 설명해 줬지만, 그 역시 요약된 정보에 가까웠다. 마치 병원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투어 같았다. 정보는 많고, 여유는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돌아올 때였다. 둘만 있게 된 그 잠깐의 정적이 어쩐지 낯설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짧게 말을 꺼냈다.
“오늘은 경황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도 잘 모를 거예요. 그냥 따라오기만 하고, 실제로 환자를 보다 보면 또 다를 거예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조금 머뭇이다가 덧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본인 그릇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그릇의 크기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건 남이 정해주는 게 아니고, 본인이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못하고, 그릇이 작다고 생각할 때 노력하면 큰 그릇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그 말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에 나왔고, 그녀의 대답은 아주 조용히, 하지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 말을 마음 한쪽에 고이 넣었다.
그 말은, 어쩌면 그녀가 나에게 해준 말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병동으로 돌아왔을 땐 오후 3시가 다 되어 있었다. 짧은 하루였지만, 신규 간호사는 꽤나 피곤한 모습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OT 날이라고 해서 업무가 멈추는 건 아니었고, 사이사이 시간을 쪼개 설명을 붙여가며 하루를 버텼다.
일정을 마치고 나는 말했다.
“오늘 정신없었죠. 기억도 잘 안 날 거예요. 괜찮아요. 조만간 다시 설명 들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작게 웃더니,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무서웠어요.”
그 말이 참 오래 남았다. 프리셉터가 된다는 건, 단지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다.
가르치기 위해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것들을 설명 가능한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보다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빠뜨리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나는 그날 알게 됐다. ‘이것 정도는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종종 오만에 가깝다는 걸.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결국 누군가는 꼭 한 번씩 그것까지 설명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뒷말이 되어 돌아온다는 걸.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나는 조금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 사이 간극은 내가 다리 놓듯 건너야 할 몫이었다.
그날, 나는 설명하는 사람으로서의 첫 하루를 보냈다.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알려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꽤나 어렵고, 소중한 일이라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