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병동의 새 얼굴

낯선 공간, 조금씩 스며드는 시간.

by 달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OT가 끝난 날. 병동 선생님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퇴근하면서 우리는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어땠어? 아직까진 할 만하지?”
누군가는 신규 간호사에게 말을 걸며 나름 친해지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낯을 좀 많이 가리는 듯했다. 원래 그런 성격인지, 아니면 이 낯선 환경이 아직은 많이 어색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를 만난 지는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저 말없이 그녀의 반응을 지켜봤다. 말보다 조용한 공감이 더 어울리는 순간들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병원 앞에서 각자 방향을 틀기 전, 짧게 한마디를 건넸다.
“집에 가서 굳이 공부하지 마세요. 어차피 오늘은 배운 것도 없으니까 편하게 쉬고, 나중에 공부해야 하는 것들은 따로 알려줄게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녀는 처음으로 환자 앞에 섰다.


다음 날 아침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전체 인계를 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환자를 직접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 옆에서 인계를 같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일하는 방식을 조금이나마 옆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앞 근무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그녀가 온전히 이해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이해를 하든 못 하든, 결국엔 내가 하나하나 다시 설명해줘야 할 것이었으니까.


괜히 인계 시간에 무언가를 전부 알려줘야 한다는 부담은 느끼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인계받을 때 꼭 필요하지 않으면 질문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인계받고 할 일부터 정리하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계가 끝난 뒤에는, 인계장을 정리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간단히 말했다. 검사를 보내야 할 환자들, 퇴원 예정인 사람들, 반복되는 루틴 업무.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그가 하게 될 일.


인계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켠 뒤, 나는 그녀에게 오늘의 일정을 짧게 설명했다.

“오늘 검사는 내시경 세 분, 그리고 퇴원 두 분, 투석 환자 한 분이에요. 나머지 환자분들은 오늘 검사나 시술은 따로 없으니까, 오더 잘 확인하고 정해진 약만 챙기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혈당이랑 혈압 정도는 직접 재볼 거예요. 학생 때 해봤던 것들이라서,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예요. 시간 여유 생기면 항생제도 같이 만들어보고, 직접 투약까지 해보는 걸로 해요.”


나는 가능한 담담하고 편안한 말투로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고개는 또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그런데도 눈동자는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 흔들림은 무서워서라기보단,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하는 실감에서 오는 떨림처럼 보였다.


그리곤 간단히 인계장과 활력 징후를 잴 준비물들을 챙겨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을 열자 익숙한 아침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안에서는 이미 실습생들이 먼저 들어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수선하고 조금은 산만한 분위기. 하지만 병동의 아침은 원래 그런 법이다. 정해진 루틴 위에 갑작스러운 검사, 예고 없는 퇴원, 돌발상황이 얹히며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환자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밤새 불편하신 건 없으셨어요?”
환자들의 컨디션을 간단히 확인하고 나서, 조심스레 그녀를 환자 앞에 소개했다.

“어제 처음 입사한 신규 선생님이에요. 오늘 혈압이랑 혈당은 이 선생님이 재실 거니까, 조금 서툴러도 이해해 주세요.”


말을 하며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가운 속 어깨가 아주 작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커프를 꺼내 들었다. 어느 팔에 해야 하는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환자가 먼저 팔을 내밀어주었다.


“이 팔로 재면 될 거예요.”


그녀는 그제야 살짝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손끝으로 천천히 커프를 감았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 그리고 감기지 않은 벨크로를 몇 번이나 다시 붙이며 애를 먹었다.


나는 굳이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다. 모든 간호사의 첫 환자는 조금 서툴고, 느리게 시작되니까.

서툰 손길이었다. 커프를 감는 데만 몇 번을 다시 붙이고 조절해야 했지만, 그녀가 재어낸 혈압 수치는 생각보다 정확했다.

나는 별다른 칭찬을 하진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 잘 됐네.”


속으로는 안도하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 환자로 넘어갔다. 장기 입원 중인 몇몇 환자들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 선생님이 신규 선생님이구나? 잘 부탁해요.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좀 별로지?” 하면서 너스레를 떠시는 환자분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머리맡에 있던 음료수를 건네기도 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며 손사래를 쳤지만, 환자는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자기 자식이 처음 사회에 나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걸 보는 사람처럼. 말투도, 눈빛도, 그 따뜻한 챙김도. 그녀가 병동에서 처음 받은 환대는 우리보다 환자들이 먼저 건넸다.


라운딩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도, 나는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본 채로 말을 건넸다.

“그 음료수 마셔도 돼요. 그거 먹는다고 김영란법에 걸리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툭 던진 농담이었다.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보려는 의도였지만, 그녀는 잠깐 웃는 듯 마는 듯,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어조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이따 9시쯤에 검사 내려가는 분이 있는데, 그 환자분은 검사 전에 꼭 혈당 재고 내려가야 하니까, 지금 가서 혈당 한 번 재보고 오세요. 혼자 할 수 있죠?”


그건 내 방식의 작은 시험이었다.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옆에 사람이 붙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지. 나름의 단순하고 조용한 기준이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혈당기를 챙기고, 다시 한번 인계장을 훑어본 뒤 조심스레 병실로 향했다.


몇 걸음 나아가던 그녀가 문 앞에서 한 번 나를 돌아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작은 눈짓 하나면 충분했다.


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레 돌아왔다. 손에 혈당기를 든 채, 어색하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수치는 정확했다. 나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혈당 기록을 정리하는 법을 보여줬다.
“이렇게 쓰면 돼요.”


그 한마디와 함께,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검사를 내려야 하니 이송사원에게 연락해야 했다.

“이런 건 보통 여기로 전화하고, 환자 이름이랑 병실, 검사명, 내려가는 시간 정도만 정확히 말하면 돼요.”


수화기 너머로 통화를 이어가며, 그녀가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는 정신없이 흘렀다.

분주한 걸음, 반복되는 호출음, 끊임없이 오가는 환자들. 어느 순간, 정규 약과 주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는 어떻게 정리하고, 어떤 기준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약은 시간이었고, 정리는 루틴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조금씩 병동의 시간을 체득해 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사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밥을 거르는 날도 적지 않았다. 익숙해지면 체력도 조절하게 되고, 뭘 놓쳐도 그냥 흘려보내게 되니까.


하지만 입사 초기부터 그런 리듬을 겪게 한다면, 병동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에게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나도 모르게, “우리 밥 먹으러 내려가요.” 그렇게 말했다.

평소에도 함께 식사하던 파트장님, 책임 간호사 선생님, 몇몇 동료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색했다. 늘 함께하던 사람들이었고, 익숙한 풍경인데, 그날은 그 조합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 어색함은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더 컸을 것이다. 식당으로 가는 짧은 이동 시간, 누구도 말이 많지 않았다.

무언의 공기가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서로 눈치를 보며, 말문을 열 듯 말 듯 망설이던 그 시간.


식탁에 앉자, 어김없이 시작된 건 간단한 스몰토크였다.
"나이는 어떻게 돼요?"
"형제자매는 있어요?"
"어디 살아요?"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아도, 언제나 신규가 오면 자연스럽게 돌던 그 호구조사였다.
익숙하고 지루할 법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소소한 질문이 분위기를 조금씩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짧게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래도 웃으려는 표정은 느껴졌다.

나는 옆에서 별다른 말 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다. 중간에 파트장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툭 던졌다.


"근데 이 선생님은 말이 없어요. 말 좀 시키면 대답도 잘 안 해요. 그래도 일은 잘하니까, 좀 참아요."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뭐라 반박하진 않았지만, 그 말속엔 나름대로의 평가가 담겨 있었다.

신규 간호사는 작게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굳이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중이었다.


점심 식사 후, 병동 분위기는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신규 간호사가 왔으니 다들 편하게 대해주자는 암묵적인 분위기였다. 그래서 휴게실에 잠시 모여 앉아 간식도 같이 나눠 먹었다.

하지만, 나는 곧 호출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규 간호사가 같이 나가려 했지만, “그냥 여기 있어요.”

내 한마디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파트장님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둬. 원래 저래. 속에 담아두는 사람도 아니고, 네가 일어나면 더 불편하니까 그런 거야.
성격이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모두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이 병동의 한 조각임을 새삼 느꼈다.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업무에 집중하느라 휴게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 휴게 시간이 끝났는지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아까 내가 마시다 놓고 온 작은 음료수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그 세심한 배려에 잠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요.” 한마디 건넸지만,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인계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은 다행히 내 동기가 인계를 받으러 와서 조금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인계가 이루어졌다.


어느새, 전체인계가 끝났는지 동기가 나타났다. 나긋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이죠? 성격이 좀 더러워도 이해해요. 나도 그래서 별로 안 건드리거든요.”

그 쾌활한 웃음을 보며 나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인계를 주고받으며 그날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스몰 토크도 이어졌다.


“오늘 괜찮았대, 그분? 신규 간호사 오면 맨날 난리던데?”

“그건 나도 아는데… 글쎄, 오늘은 조용하더라. 전에 한마디 들어서 그런가 봐.”

작지만 따뜻한 대화 속에서 그날 하루가 무사히 마무리됨을 느꼈다.


인계가 끝나고, 신규 간호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분, 원래 신규 간호사 별로 안 좋아하시나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뭐, 그렇다곤 하는데, 저분도 저 연차 때는 똑같았어요. 그냥 그런 분이지, 특정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에 신규 간호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의 긴장과 어색함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앞으로 넘어가야 할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그 신규 간호사가 점차 병동에 적응해 가며 겪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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