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살고 싶다는 말을 삼키는 시대

환자도 부탁하고 싶다. 환자의 선택 앞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

by 달꼼

결국 투석은 시작되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보호자도, 그리고 어쩌면 환자도 이 방향으로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전날 면담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분명히 어떤 문장 하나를 잘 정리해서 말했지만, 사실은 그 말보다도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 말이 누군가의 결심을 바꾸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말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결정을 내리게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의 시간을 덜 외롭게 만들기 위한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다음 날, 환자분은 평소보다 더 힘든 기색으로 병실에 계셨다.


어깨는 더 움츠러들어 있었고, 좀 더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컨디션이 나빠 보인다는 표현보다, 마음까지 꺼내놓고 나니 더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호자분 역시 말이 없었다. 그저 우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볍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그 한 마디도 없었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고 있었고, 더 이상 말을 보태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더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투석실로 환자를 보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왜 마음이 이렇지?"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건 마음의 준비를 끝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날의 감정은, 매번 낯설게 찾아온다.

환자가 투석을 결정한 게 아니라, 그 누구도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장면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환자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고, 평소에도 내가 언제까지 살겠냐며 말하곤 하셨지만, 정작 몸이 정말 힘들어졌을 때는 그런 말조차 하지 않으셨다.


자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치료가 무의미해질까 걱정된다는 말,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싫다는 말. 그 말들은 보통 말이 아니라 거절에 가깝다. 그 마음을 알기에 보호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보호자가 그날 무슨 마음이었을지 생각했다. 환자가 투석을 시작하게 되면 자신이 곁에서 얼마나 더 함께 해야 할지, 이 치료가 환자에게 어떤 고통이 될지를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이 선택이 정말 환자를 위한 선택이 맞는지 스스로 수십 번, 수백 번 되묻지 않았을까.


아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공간의 공기가 무거웠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우리는 숫자로 상태를 말하고, 시술이나 치료라는 단어로 과정을 설명하지만, 그날은 숫자보다도 묵묵한 침묵이 상황을 더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다.
어떤 경우엔 그런 태도가 칭찬받고, 어떤 경우엔 너무 슬프다. 살고 싶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회.


“나도 조금 더 있어도 될까요?”라고 묻기 어려운 분위기.
그래서 환자는 마음을 꾹 누르고, 보호자는 그 마음을 짐작하지만 말하지 않고, 간호사인 나는 그 사이에 멈춰 서 있게 된다.


누구의 마음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누구의 마음도 모르겠다고 말할 수 없는 자리. 그 자리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익숙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되뇌게 된다.


“이 선택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살고 싶다는 말보다 먼저 꺼낸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는 게 마음이 무겁다.”


나는 보호자 분에게 동의서를 받기 전, 잠시 말을 꺼냈다. 그건 절차적으로 필요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환자분이 연세가 많으셔서요, 투석을 진행하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그건 단지 투석을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점점 노환이 진행되면서 생기는 것들이 투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탓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요.”


보호자 분은 가만히 내 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중간에 살짝 숨을 고르는 것처럼 눈을 감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를 납득시키려고 하거나, 책임을 피하려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그분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 순간만큼은 간호사라는 신분보다 그저 사람으로서 말을 건넸으니까.


나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환자 분은 연세가 많으시죠. 그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실일 거예요. 이번 투석은 분명히 치료의 시작이긴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적응이 되신다면, 인생의 마지막 장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이 너무 무겁게 들리진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이라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을 너무 가까이 들이대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빼먹지 않고 꼭 하고 싶었다. 치료의 목적이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시간을 지나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보호자 분은 잠시 침묵하다가, “네…” 하고 짧게 대답하셨다.

그 말에 모든 게 담겨 있는 듯했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사인을 했는지는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때로는 말없이 넘기는 것이 서로를 위한 예의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치료라는 단어는 너무 단단해서 그 단단함이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한다.

환자는 몸이 아프기 때문에 병원에 오지만, 그 몸을 끌고 와서 끝내는 결정이라는 이름의 짐까지 스스로 감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호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함께 한다는 이유만으로 결정을 대신 떠안고, 혹시라도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무게를 죄책감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장면을 수도 없이 지켜보게 된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단지 “문제 생기면 말해주세요”라는 한 마디가 아니라, 그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조금 더 인간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싶었다.


설명이 아니라, 설명하는 순간의 공기까지 포함해서 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아마 그날 보호자 분은 상태에 대한 설명보다는 그 말투와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충분하고, 그 선택이 누구에게도 후회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첫 투석은 큰 문제없이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특이사항 없음.
혈압도 안정적이었고, 중간에 큰 통증을 호소하지도 않으셨다. 환자 분은 투석을 마친 뒤 병실로 돌아와서 조금은 편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정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아니면 보호자를 안심시키려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건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보다 표정이 좋아 보인 건 분명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눈에 머금은 힘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고 느껴졌다.


이건 기록에는 남지 않는 변화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변화이기에 보호자 분도 조금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걱정을 마주한 하루였기에, 그 하루를 무사히 넘긴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할 거라 장담할 수는 없다. 투석은 오늘 한 번으로 끝나는 치료가 아니고, 이제 막 시작된 반복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때론 고단하고, 때론 지치는 일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여정을 함께 걸을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거창한 위로나 불필요한 확신이 아닌, 그저 환자와 보호자에게 꾸준히 말을 건네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변화를 놓치지 않고 살펴보는 것. 어쩌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한 번 더 얼굴을 마주하고, 상태를 묻고, 보호자의 표정을 살펴보는 일. 그런 것들을 하면서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바라게 된다.


오늘 하루가 환자 분에게도, 보호자 분에게도 너무 힘든 하루로 기억되지 않기를. 무사히 지나간 하루가 그저 지나간 하루로 남기를. 그리고 그 하루가, 조금은 안도할 수 있는 밤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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