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말을 꺼내는 용기,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상처와 외면, 참음과 불안 사이의 균열

by 달꼼

“그렇게 생각했으면 말을 하지, 왜 가만히 있었어?”
사람들은 말한다.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했어야 한다고. 마치 말하는 게 언제나 쉬운 일인 것처럼.

하지만 정작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도, 나는 망설이게 된다. 지금의 나는 말하고 싶지만 아직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용기가 없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말을 꺼낸 후 돌아올 반응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말을 하면 되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해결책은 있어?”


그 물음들은 어쩌면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속도와 방향은 어쩐지 벽처럼 느껴진다. 내가 꺼낸 이야기는 정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보자는 시작에 불과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결론부터 요구한다.


마치 모든 불편함은 그것을 꺼낸 사람의 몫인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말을 삼킨다. 말하면 괜히 피곤해지고, 나만 튀는 사람이 되니까.


그저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곧 나의 태도, 성향, 문제의식이 협조성이라는 잣대로 재단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조용한 사람이 되고, 그 조용함은 점점 익숙해지고, 결국 당연해진다.


조직은 종종 소통을 이야기한다. “편하게 말해도 된다”, “자유롭게 의견을 내라.”
하지만 그 말에는 조용한 전제가 함께 붙는다. “적당히, 부드럽게, 그리고 가능한 한 불편하지 않게.”


결국 말은 하되, ‘조심스럽게 하라’는 뜻이다.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태도 앞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늘 머뭇거리게 된다.

사람들은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알고 있다. 다만 모르는 척할 뿐이다.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면, 무언가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바꿈은 불편하고, 귀찮고,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그들은 말보단 침묵을 택하고, 문제를 덮는 방식으로 안정감을 유지한다. 결국 말한 사람이 문제의 중심에 서고, 불편함은 조용히 치워진다.


그 구조 안에서는 피해받는 사람이 계속 바뀌지만, 피해를 주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피해를 보지 않는 사람들은, 피해받는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은 괜찮으니까.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다만, 불필요한 문제를 들추는 까다로운 사람일 뿐이다.


“예전엔 다 참고 일했어.” “지금 애들은 예민해.”

이런 말들 속에는 ‘나도 참았으니 너도 참아야 해’라는 말이 숨어 있다.


참음이 미덕이던 시절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예민한 사람’이 된다. 나는 간호사로 일하며, 참 많은 것을 보았다.

말을 아끼는 이들, 말하려다 주저앉는 이들,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소외되는 이들. 그리고 그들 모두 언젠가는 조용히 떠난다. 상처를 크게 남기지 않으려는 듯 말없이.


말은 설득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기거나 꺾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려는 시도다.

내가 꺼내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라는 작은 질문. 그 질문이 언젠가 조직을 흔들 수 있다면.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아직은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생각들을 말보다 더 조용하게 꺼낼 수 있는 글이라는 형식으로 생각을 다듬고, 언어를 가다듬으며, 언젠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처럼.

나는 지금 그렇게 연습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정말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한 해결책만 제시할 거라면 애당초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을 꺼낸 건, 해결책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그냥 참고 견디라는 말 말고도,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가벼운 신뢰 한 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원하는 건 해답이 아닌, 적어도 나의 문제 제기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받는 느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사람들은 문제점을 말하면 되묻는다. 그 질문은 때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는 숨이 막힌다. 마치 네가 문제를 제기했으니 답도 네가 내라는 듯이.


그 질문은 결국, ‘네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야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해답이 없으면 말하지 말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멈춘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괜한 사람’이 될까 두려워서,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혹은 돌아올 질문들을 감당할 마음이 없어서.

그런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묻기보다 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 말해도 듣고 바꿀 용기가 있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조직은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해결책보다도 공감과 신뢰, 그리고 위로가 필요해서 그 말을 했던 것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