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차가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차가움

질문은 문제를 만든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by 달꼼

조직 안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종종 예상치 못한 저항과 냉대를 마주한다. 그들이 던지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판은 기존 질서를 흔들고, 안정감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변화란 불확실성과 불편함을 동반하며, 조직은 본능적으로 그런 불안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문제를 만드는 사람, 조화를 깨는 존재로 치부되기 쉽다.


반면, 아부하거나 기존 질서에 편승하는 사람들은 조직 내에서 안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며, 눈에 보이는 충성을 통해 인정받는다.


이 과정에서 조직은 자신들의 권력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고, 구성원들도 즉각적인 보상을 얻는다. 이러한 안정적인 행동 패턴은 조직 구성원들에게 무의식적인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는다.


변화와 혁신을 외치는 이들은 조직의 불편한 진실이 되기에 밀려나고, 아부와 순응을 택한 이들은 ‘현실의 생존자’가 되어 조직 내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나 변화와 질문을 밀어낸 조직은 점점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시작한다. 불편한 목소리를 제거하며 잠시의 평온은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


침묵과 순응이 미덕이 된 자리에서는 문제를 감지하는 감각도, 해결을 모색하는 열정도 사라진다. 구성원들은 점차 말하지 않게 되고, 생각하지 않게 되며, 결국은 책임조차 지지 않게 된다.


그 결과로 조직은 스스로 무기력과 정체 속에 갇히게 된다. 단기적 안정을 위해 외부의 바람을 차단한 결과, 안에서는 공기가 정체되고, 언제부턴가 썩기 시작한다.


낡은 규칙을 질문한 사람은 떠났고, 이제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리스크를 피한 조직은 결국 변화도 피했다. 살아남았지만, 살아있지는 않게 되었다는 결론이지 않을까.


남은 것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굳어버린 집단이다.


떠나는 쪽은 언제나 질문했던 사람이다. 문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문제를 피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 하지만 조직은 그런 사람을 문제아로 규정하고, 그 자리를 스스로 내주게 만든다.


흥미로운 건, 그들을 밀어낸 이들이 반드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그들도 알고 있다. 지금의 결정이 옳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 방향이 자신에게 편하다면 그 불편한 옳음은 쉽게 외면된다.


사람은 자신이 불편해지는 상황에는 관대하지 않다. 약자의 고통에는 공감하는 척할 수 있지만, 실제로 불편을 감수하며 손을 내미는 일은 드물다. 공감을 가장한 관망이 반복되고, 그 침묵은 어느 순간 냉담이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조직의 문화는 자기 중심성 위에 세워진 연약한 연대다. 남의 고통에 눈 감고 자신만의 평온을 지키는 이들 사이에는, 책임도 연대도 자라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일을 하다 보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제들에 의문이 들곤 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지? 이 방식이 정말 옳은가? 그런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은 고개를 돌린다. 문제를 인정하는 순간 그것을 바꿔야 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임은 귀찮고, 무엇보다 불편하다.


그것이 꼭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불편을 피하려 한다. 다만 내가 의문을 가지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은 너무 쉽게 말하고 판단하면서 정작 자신의 고통은 특별하다고 여긴다. 타인의 인내는 당연하고, 자신의 피로는 유난스럽다고 느낀다.


이걸 단순히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니까'라고 말하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말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견딘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자신이 감당해 온 무게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고통엔 덜 민감해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질문한다. 나의 침묵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나의 순응은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오늘도 그런 장면을 마주했다.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고, 나는 단지 그 사실을 전달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숨어 있었다.


“네가 와서 봤으면 좋겠어.”


단지 상황을 알리는 듯한 말이지만, 그 뒤엔 책임을 전가하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본인이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고 ‘이건 내 일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태도.


그 선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문제는 단지 일의 경계에 있지 않다. 경계를 판단하는 건 그 사람의 생각이고, 그 생각은 태도가 된다.


내 일이냐, 아니냐는 따질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늘 묻고 싶다.
“앞에서 환자를 본 건 당신이잖아요. 그 상황에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나요?”


내가 상급자가 아니더라도, 그 상황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저 말을 전달하는 입장이더라도.
단지 말만 전해졌을 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과 해결의 몫을 떠안게 된다.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무심함 속에 담긴 무게를 너무도 자주 감당해 왔기에 오늘도 피곤했다. 그리고 그런 융통성조차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서운했고, 지쳤다.


내가 그 상황에서 화가 났던 건, 환자를 직접 보러 가는 일이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나도 바쁘고, 그도 바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문제의 이유를 직접 찾아보려 하지 않고, 단순히 "누가 와서 봐줬으면 좋겠다"는 말로 책임을 넘기려 할까.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단지, 매번 그런 식이라면 주변은 그를 무능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건, 정작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은 단지 도움을 요청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복되는 회피 속에 누적된 피로는 결국 신뢰를 깎아먹는다.


아무 말 없이 넘긴 그 한마디가 타인에겐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걸 모른다. 그런 장면들을 마주할 때면, 나도 점점 어떤 마음을 닫아가게 된다.


‘어차피 내가 더 고민하고 더 움직이는구나’라는 생각. 그렇게 마음을 덜 쓰게 되고, 정이 덜 붙는다. 어느새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감정을 조절하며 거리 두기를 계산하는 상대가 된다.


그렇게 나는 점점 말을 줄이게 되었다. 불필요한 오해도, 감정 소모도 피하기 위해서. 타인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서운해질 일도, 실망할 일도 줄어든다.


누군가에게 나는 무뚝뚝하고, 차갑고, 그저 일만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같이 일해도 정이 안 가는 사람"이라는 말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다. 감정을 쉽게 쓰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 그 사람이 좋고 싫고를 떠나 조직 안에서 관계에 기대지 않으려는 나의 무기력함이 그 안에 숨어 있다.


이상적인 팀워크, 건강한 관계, 다 이해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나는 점점 배우게 된다. 기대하지 않으면 덜 무너지고, 덜 다친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이제는 감정까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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