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cat, 지독히 향기로웠지만, 여운은 짧았던 인연

by 에포트리슬리

마(魔)가 낀 것이 분명하다.

그 녀석 이후로는 꼭 9살 연하만 꼬이는 것이.


인도네시아에서 온 30대 초반의 아이였다 (앳된 얼굴이 마치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애 같았다). 처음 만난 날이 기억도 없을 만큼 인상적이지 않았고,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이 필요할 만큼 볼품없이 마른 아이였다. 머리카락이 뻗친 직모의 스포츠 헤어 스타일에, 겨울을 겪은 적이 없는 아이가 한국에서 급조달한 외투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잘생김이라고는 이목구비 어느 언저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남자와 오랜 연애 끝에 외모지상주의자가 된 나로서는 매력을 느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독특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영어 억양은 알아듣기 힘들어 회의 시간마다 못 알아듣기 일쑤였다. 이른 나이에 결혼까지 해 아이가 둘이나 되었던 그는 자신의 형편이 여의찮아 고백다운 고백을 못 하면서도 내 주변을 한없이 맴돌았다.


내가 뭐라고,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와이프와 가족을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유난히 모질게 대했다. 그래도 높은 업무 강도와 마음고생에 불면증이 생겨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병원 진료는 받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동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와 딱 9살 차이가 나는구나.


그다음은 라트비아였나, 리투아니아였나? 두 번째 9살 연하 썸남은 국적조차 가물가물하다. 나는 별로 투쟁 정신이 없다. 패배를 감지하거나, 어려운 승부라는 느낌이 오면 과감히 포기한다. 이 남자는 연예인급의 외모에 키도 커서 모든 젊은 직원들이 좋아했고, 나랑 같이 다닐 때면 매서운 눈길이 나에게도 꽂혔다.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미 포기한 게임이었으므로. 삶의 경험을 통해 인물값 안 하는 남자는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나는 잘생긴 남자를 탐내지 않는다.


직접 만나기 전에는 니키타라는 이름 때문에 일본인인 줄 알았다. 키가 190에 육박하고, 마른 체격의, 연예인급 외모의 니키타. 솔직히 호감은 있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니키타는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런데도 다른 여자를 만나 볼 의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정조 관념 없는 남자는 별로다. 하지만 적당히 매너가 있었고, 적당히 밥을 잘 살 줄도 아는 니키타가 친구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니키타와 처음 친해진 것은 같이 한의원에 가면서부터다. 뻐근한 몸 통증에 한의원을 향하던 길에 니키타와 마주쳤다. 어디 가냐는 질문에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본인도 여기저기 아프다며 따라오고 싶어 해 쌩뚱맞게도 리투아니아인(라트비아인인가?)과 한의원에 같이 가게 되었다. 병원 통과 의례상 니키타의 생년월일, 불편한 증상 등을 물어 통역해 주었고 그때 알았다. 나와 9살 차이구나.


니키타는 한국을 떠나기 전 프로젝트 매니저로 새 직장을 잡게 되었다며 옷과 신발을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현대백화점에 가서 세련된 20, 30대 남자들 좋아하는 브랜드로 니키타를 안내해 주었다. 두어벌 골라 입어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탈의실 밖에서 기다렸다. 니키타가 문을 열고 정장을 입고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턱이 툭 떨어지고, 입가에는 침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흘린 침을 황급히 훔쳤다. (아, 드라마나 만화에서 놀랄 때 턱이 떨어지고, 침이 흐르는 것이 과장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다). 샵 매니저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니키타의 비주얼에 감탄한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런 저런 말들을 급하게 뱉어내며 수습을 시도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니키타는 일탈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심심했는지, 간절한 눈으로 작업을 걸었지만,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남자와는 연을 만들지 않는다는 나의 지론대로 아주 친절하게 거부해 주었다. 역시나 아쉬울 것이 별로 없던 니키타는 쿨하게 포기해 주었다.


나를 찾아온 9살 연하남들의 시퀀스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인간과는 실제로 사귀었기에 나에게는 의미가 있어 가장 마지막에 적는다.


이 인간은 내 옆 옆 자리에 앉던 다른 회사의 신입 직원이었다. 원래 프로젝트 사무실에는 여러 회사의 직원들이 섞여 앉는다. 키도 크고 인물도 준수한 편에 앳된 얼굴의 친구였는데, 연하는 남자로 보지 않았던 탓에 한동안은 나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 친구를 인지하게 된 것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상사에게 무참하게 깨지던 모습 때문이었다. 업무가 어찌 그리 미숙한지 날마다 사소한 지청구에 큰소리까지, 너무 불쌍해 보였다. 그 부장님도 참, 다른 회사 직원들도 많은 사무실에서 뭘 그리 큰 소리로 야단을 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부장님이 그 부하직원을 좋아해서 그렇게 혼을 냈던 것이라 한다. 이해할 수 없다. 좋아할수록 잘해줘야지 왜 반대의 행동을 보이는지. 가끔 그렇게 청개구리 사랑법을 시전하는 부류가 있다. 여하튼 진심 그 청년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불쌍해서, 순수한 측은지심에 커피를 한 잔 사다 준 적이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생뚱맞게 그 청년의 남자 상사와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나에게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확인한다. 잘생기고 나이스해서 아주 인기가 많았던 그 분이 결혼 여부를 묻자 나는 마음이 설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이미 결혼했었고, 결혼 여부의 확인은 그 청년의 부탁이었다. 내가 반지를 끼고 있는 걸 봤다며, 결혼할 줄 알았단다.


다음날 그 둘 모두를 커피숍에서 마주쳤다. 타고난 성정이 쾌활하고 사회적인 나는, 농담 따먹기도 좋아했던 나는 그 청년에게 “왜 남의 혼삿길을 막느냐”며 장난을 쳤다. 얼굴이 빨개진 그 청년은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하더니 나중에는 카톡으로 “밥을 사겠다”고 한다. 원래 눈치가 빠른 편이지만 그 순간까지도 남자 상사의 부탁으로 다리를 놔 주는 것인 줄 알았다.


여하튼 사겠다는 밥은 얻어먹기로 하고, 이소룡인지 성룡인지 비슷한 이름의 대만 누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얻어먹은 답례로 나의 단골 와인바에서 와인을 샀다. 내가 다닌 와인 스쿨의 지하에 위치한 그 바에는, 그날따라 나의 지인인 와인 스쿨 관계자가 자리를 먼저 잡고 있었다. 내심 딱 봐도 연하인 멋진 남자와 함께 앉아 있는 나 자신이 으쓱했다.


와인을 마시면서 그 청년은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수줍지만 당당하게 고백했다. 얼결에 생각지도 않은 고백을 받은 나는 그 순간 나는 쉬운 여자답게 이미 속마음으로는 “예스”를 외쳤다. 그러나 “아니, 또래를 만나야지 왜 이모를 만나?”라고 솔직한 마음을 얘기했다. 본인은 예전 여자친구도 연상이었다며 나이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왜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너무 재미있고, 일도 정말 잘하더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사실이다. 나는 웃기는 말을 잘하고, 일은 그런대로 제법 잘한다. 환상이 아닌 사실에 근거해서 나를 좋아한다니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결국 나는 그 친구와 사귀기로 했다. 이 친구와 사귀기로 결정한 데는 이전 남친의 역할이 컸다. 바로 직전에 나보다 4살 연상을 만난 적이 있다. 186cm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에, 좋은 학벌에, 돈 잘 버는 직업에, 좋은 집안에 부족한 것이 없는 그 남자는 (바로싸 쉬라즈 장의 그 남자다) 자기 잘난 맛에 온갖 독선과 독설로 가득한 남자였다. 나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얼마 동안 시간을 함께 보내보니 좋은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었고, 그 남자는 열등감 덩어리였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 남자와의 만남은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인간의 성숙함과 인격은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강렬한 깨달음을 주었다. 전 남친에게 천대받던 나를 따뜻하게 챙겨주고, 추운 겨울날에는 차를 덥혀 놓은 후 집에 데려다주던 따뜻함과 배려 덕에 나는 쉽게 그 청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연애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두 번 더 만났던가, 날이면 날마다 바쁘던, 말단이라서 더욱 바쁘던 그 남자는, 사소한 말다툼 끝에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가는 남자 붙잡는 뚝심이 없는 나는 그렇게 이별을 맞았다.


만났던 기간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그 사람을 잊을 수 있다고 했던가? 고작 한 달도 가지 않았던 그 남자를 6개월은 그리워했던 것 같다. 참 이상하다. 첫 남친을 10년 넘게 만났지만 헤어지고 전혀 미련이 남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정리된 상태에서 헤어짐을 통보한 탓인지 정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와 헤어진 후에는 집에 오는 광역 버스 안에서 코트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던 것 같다. 누군가 이 코트를 입은 나를 보고 빨간 망토 차차라고 불렀는데, 얼굴과 머리 전체를 가리고도 남았던 그 모자 덕에 퉁퉁 불은 눈을 감출 수 있었다.


뮈스카 (Muscat), 또는 모스카토 (Moscato).

프랑스 알자스에서 많이 생산되는 품종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모스카토 다스티라는 가벼운 프리잔테, 스푸만테 스타일의 스파클링 와인으로도 생산된다. 호주와 캘리포니아에서도 비슷한 스타일의 스파클링 와인이나 달콤한 스틸 와인으로 인기가 많다. 가격도 USD 10 이하로 저가 와인이 많다. 뮈스카 드 봄드 브니스, 뮈스카데 데 세투발이라는 주정 강화 와인으로도 생산된다. 특히 모스카토 다스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향이 풍부하고 가벼운 스타일로 매일 마시기에 좋다. 오렌지 블로섬과 같은 꽃향기와 포도 자체의 향으로 유명한 품종이다. 이쯤 되면 와인 입문서 급이군.


모든 사랑이 그렇지만 특히 이 연애는 병을 따자마자 폭발하는 화려하고 풍부한 향이 좋았다. 그의 호의와 친절은 바로 마시기에는 너무 좋았다. 다만 아쉽게도 뮈스카의 향이 그렇듯 오래 가지는 못했다. 서로를 깊게 알아갈 수 있을 만큼의 시간조차 보내지 못했다. 컴플렉시티 (Complexity, 복합적 풍미)는 아쉽지만, 모스카토 다스티처럼 가볍고 설레였던 연애였다. 사랑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 언니 말마따나 “1년 이하의 연애는 간 보기(?)이므로…… 솔직히 연애라고 말하기에도 너무 짧았던 만남이었으나, 뭐라고 딱히 이 관계를 규정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