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넘는 장기 연애를 마치고 나는 연애라면 지긋지긋했다. 첫 연애의 마지막 몇 년이 설렘도 희망도 없는 연명 치료 상태라 그랬던 것 같다. 남자라면 그냥 넌더리가 나던 몇 해가 지나고, 나의 베프 윤이 엄마 친구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키가 큰 훈남에 금융업에 종사하는 능력 있는 남자. 믿음도 좋고, 부친도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고 했다. 그때는 어떤 마음으로 소개팅에 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전화번호를 건네주고 며칠이 지난날 낯선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묵직한 바리톤 음성의 남자였다. 전화 목소리가 일단 너무 좋았다. 이미 목소리에 마음을 뺏긴 당사빠인 나는 그 남자에게 벌써 마음이 가 있었다.
내가 자주 가던 삼청동의 카페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들은 것보다 훨씬 미남이었다. 정장 차림으로 나온 남자는 키도 훤칠했고, 모델 부럽지 않은 채형에 슈트핏도 기가 막혔다. 유머 감각이 어찌나 좋은지 커피숍에서 나눈 대화가 너무 즐겁고 유쾌했다. 삼청동의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남자는 자기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첫 데이트를 마치고 난 내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 이 남자를 너무 갖고 싶었다. 유치한 단어이지만 그때의 심정이 꼭 그랬다. 애프터가 올까 하는 의구심에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얼마나 이 남자가 탐이 났는지 주말 내내 마음이 난도질되었던 나는 원래 내 스타일과는 달리 먼저 연락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나는 영화는 뒷전이고 그 남자에만 관심이 온통 쏠려 있었던 것 같다. 영화 관람 후 그 남자는 나를 이자카야와 같은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통의 데이트라면 이태리 식당이나, 조용한 레스토랑을 생각했던 나는 상당히 실망을 했다. 3차는 노래방을 갔는데 거기서 나는 다른 사람을 보았다. 노래도 가수 뺨치게 잘하는 건 오히려 인상적이지 않았다. 첫 만남 때에는 어머니 친구가 소개한 사람이라 부담스러웠는지 잔뜩 예의를 차리더니, 노래방에서는 의자에 올라가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가관이었다. 그럼에도 유쾌한 그 남자가 좋았다.
그날의 데이트 이후 우리는 남자 친구, 여자 친구가 되기로 했다. 나는 조건으로나 외모로나 빠질 것이 없는 그 남자가 든든하고도 좋았다. 상남자 스타일에 과격하고 단순한 그 남자는 마치 탄닌이 많고, 묵직한 바디감에, 잘 익은 jammy 한 과일 풍미가 넘치는 바로사 쉬라즈 같던 남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많이 좋아했다.
그런 그 남자가 하나 없던 게 있으니 좋은 성품이었다. 내 지론은 “얼굴값 안 하는 남자는 없다”이다. 외모나 조건에서 빠질 것 없던 이 남자를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았겠지.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아쉬울 게 없었다.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지만 남자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나의 관계에 대한 정의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없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하던 이 남자. 모든 것을 다 맞춰주던 나는 이 남자에게 슬슬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만난 여자 중 네가 가장 늙었다”는 말은 둘째 치고, 데이트 중 좋은 곳은 데려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에게 인색했다. 나를 배려하는 것은 좋아하는 커피나 실컷 사주는 정도였다. 가족들과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길에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도 날름 받기만 할 뿐 나에게 사소한 선물 하나 한 적이 없다.
무례한 언행과 무성의함에도 나는 무던히 꾹 참았다. 이 남자와 싸우면 그대로 이별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람은 다툼이나 반목을 넘어설 줄 안다. 그러나 미성숙한 사람은 다툼이 곧 관계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 끝에 이 남자는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툼의 끝에 구체적으로 헤어짐을 언급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만 만나자는 류의 교통정리가 있었을 듯하다. 그 남자와 만난 6개월 동안 인내심이 바닥날 대로 바닥난 나는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만큼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이 남자와 어찌어찌 잘되어 결혼에 이르더라도 결국은 파경에 이를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결말을 감수할 정도로 좋아하지도, 그렇게 미련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남자가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심심해지면 연락할 것을 이미 예감했다. 가벼운 태도로만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익숙했던 남자는, 나처럼 진중하고 진심으로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몇 달이 지나 저녁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익숙한 번호의 전화를 받을지 말지 망설였다. 전화번호를 지웠을 것 같은데, 자주 보던 번호라 그라는 것을 바로 알았던 것 같다. 호기심이 너무 많은 나는 일단 그의 전화를 받았다. 뭐 하냐고 무람하게 마치 어제까지 통화한 사람처럼 묻던 그에게 바쁘다며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귀찮은 듯 대답했다. 내심 섭섭한 목소리의 그는 보통 때 같으면 짜증을 내거나 퉁명스럽게 대응했을 법도 한데 그날따라 약간은 볼멘 목소리지만 수더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다른 남자 친구가 있었던 나는 “다시 연락하지 말라”라고 단호하게 매정하게 그에게 쐐기를 박아 주었다.
조금은 통쾌하고 고소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런 날을 내심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당연히 결혼은 안 했을 테고 - 그 성격에 받아줄 사람 없다 - 친구로는 너무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인데. 가끔 만나 소맥이나 한 잔 하고 싶다. 노래방에서 그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고 나면 일상의 시름을 잠시 잊을 것 같기는 하다. 더 이상 잘 보일 것 없는 인연이니 참았던 솔직한 팩트 폭행도 실컷 해 줄테다.
그 남자와 영화관 데이트를 할 때 회원가입이 되어 있던 언니에게 프리미엄 좌석을 부탁했다. 언니는 콧대 높은 동생이 공을 들이는 남자가 누구인지 사뭇 궁금했었나 보다. 나중에 남자에 대해 자세히 듣더니 “결혼한다고 하면 꿀리지 않게 바리바리 싸 보내 주겠다”며 당찬 다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모친의 반응은 더욱 용맹스럽다.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모친은 “남자가 너무 꿀린다”며 근거 없는 자식 자신감을 내비친다. 하도 기가 찬 내가 “엄마, 내가 꿀리거든” 하며 웃으며 답했다.
내가 꿀릴 일도, 언니가 한밑천 바리바리 싸 보낼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어진 모친과 언니가 어찌나 든든했든지. 부친과 사이가 안 좋아 꽉 차다 터진 나이에 가출까지 감행해 그 소재를 묻는 전화까지 받게 한 콩가루 집안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이 내심 흐뭇하다.
그는 3시에 업무를 끝내고 오늘도 여전히 어디선가 낮술을 먹고 있겠지.
*내가 너무 방심했다. 이 바로사 쉬라즈남은 결혼을 했단다. 분명히 그 와이프는 불행할 거야. 신포도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