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받던 날... 쎄~하구나

by 에포트리슬리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권한 후 결과를 들으러 갈 때의 시나리오는 딱 두 가지이다.

괜찮거나, 좋지 않은 경우이거나.

대부분 나와 내 주변의 경우 전자의 케이스였다.

“큰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계속 정기검사는 받으세요”

당연히 이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사 결과에 불안해할 언니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병원에 같이 가기로 했다.


성질 급한 나는 진료를 기다리는 사이에 수납하려고 원무과에 먼저 들렀다. 원무과 직원은 쭈뼛쭈뼛하며, 산정특례 적용을 받으면 병원비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진료를 마치고 수납을 하라고 했다. 황급히 검색 창을 열어 산정특례를 검색해 봤다. 주로 중증난치질환자, 암환자에게 적용되는 의료혜택이라고 한다. 대충 감이 왔다.


최근까지도 그 흔한 고혈압, 당뇨 같은 기저 질환 하나 없이 건강했던 부친은 여자들만 가는 줄 알았던 유방외과에서 조직 검사를 받은 후 암환자가 되었다. 겨드랑이 밑 림프절 조직을 떼어내서 하는 검사라 유방외과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름도 생소한 Angioimmunoblastic T-cell 림프종이라고 의사가 알려주며, 철자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의사도 침착했지만, 환자 가족도 침착했다. 울고 불고 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하다. 드라마에서 본 것과 같은 그런 감정적인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감정적이 될 틈도 없었다.


금시초문인 이 병명을 휴대폰에 메모해 와 검색해 보았다. 별로 좋은 녀석은 아닌 듯했다. 병원 측의 배려로 바로 당일 혈액종양내과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대형병원이라도 고령의 중증 환자에게는 자비와 배려가 작동하는 듯했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은 림프종은 진행이 빠르다면서 바로 치료 일정을 잡을 것을 권유했고, 3일 후 입원해 항암을 시작하기로 했다. 고형암은 진행 속도가 비교적 빠르지 않아 어느 정도 고민할 여력이 있겠지만, 불과 3개월 전 입원했을 당시 온몸을 샅샅이 훑었던 검사 때도 나타나지 않았던 이 고약한 녀석이 불과 3개월 만에 온몸의 림프절에 상당히 광범히 하게 퍼져 있는 상태라 망설이고 좌절할 틈이 없었다.


세련되고 냉철한 보호자가 목표인 나는 기대 여명이라든지, 항암 후 치료 가능성에 대한 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환자 개인차가 클 것이고, 의사 선생님의 답도 최대한 보수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간호사에게 어떤 regimen (항암제 조합)을 사용하는지 물었다. 나는 물어야 했다. Regimen에 따라 항암 회수가 다르고, 그 회수는 곧 나의 동반 입원 회수이자 입원 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의 진단 후 나는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분노로 힘들었다. 평소에 스테로이드계 무릎 주사를 일상적으로 맞고 다녔던 부친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본인 몸 관리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평생 청년일 것처럼 했던 행태에 화가 났다. 더구나 이 기나긴 간병 전쟁의 주요 의무부담자가 나일 것이라는 예감이 더 화가 났다. 일하랴, 공부하랴 바쁜 내 스케줄에 큰 차질을 던지는 것에도 분노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주 저 깊은 곳에 부친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구체적인 불안감이 다른 분노로 표출됐던 것 같다.


언니들은 말렸지만 나는 부친이 이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담담하게 상황을 전했다. 비교적 좋은 쪽에 초점을 맞춰서. 맞닥뜨린 상황에 대처하느라 바빠, 그리고 본인의 인생에 암초가 될지도 모르는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 포함 가족 어느 누구도 부친을 위로할 여력이 없었다.


위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왔다. 지금에 비하면 토실토실한 상태였지만, 그때도 역시 깡마른 부친이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달리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순간을 무엇으로 라 메꾸고 싶었는지 주치의 교수님이 회진을 돌면서 부친을 포근히 안아 주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대신해 주어 고마웠는지, 아니면 내 신세가 서글펐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후로도 보호자에게는 간혹 까칠했지만 환자에게는 그토록 관대하고 자애로웠던 그 교수님을 부친은 좋아했다. 폐렴에 걸려 호흡기 내과로 입원한 경우에도 혈액종양 교수님이 회진을 오면 그렇게 반색하며 좋아했다. 그 교수님을 안 만나야 좋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