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1940년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과 이후 80년이 지난 2020년 리메이크한 벤 휘들리 감독의 작품(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있다. 감독의 주관적 해석이 많아 원작이 다소 변형된 부분이 많은 2020작 보다는 세계적인 명장 히치콕의 40년작이 더 뛰어난 예술성과 작품성을 보인다고 평가된다. 이를 증명하듯이 1940년 영화는 영국 출신인 히치콕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수상작(작품상, 촬영상)이기도 하다.
1940년 히치콕의 작품을 중심으로 감상해 보기로 한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흙수저로 홀로 남은 ‘나’(조안 폰테인)는 심술궂고 까다로운 금수저 반 호퍼부인에게 고용되어 말벗이자 수행비서 생활을 하고 있다. 남부 프랑스 몬테카를로, 산책중 절벽에 서 있는 맥심(로렌스 올리비어)과 우연히 조우한다. 영국 최고의 저택이라는 맨들리를 소유한 갑부 맥심은 전처 레베카를 잃고 세계를 유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고, 영국의 명사 맥심과는 구면인 호퍼부인의 호들갑에 나는 맥심과 한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등 인연을 맺게 된다. 호퍼부인인 독감증상으로 며칠간 누워지내는 사이 맥심은 나를 불러내 드라이브를 하고 사랑을 키워간다. 그런데 호퍼부인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어 뉴욕으로 떠나려 하자, 작별 인사를 하러 급하게 맥심을 찾는데, 맥심이 뉴욕이냐 맨들리냐 선택하라 한다. 결국 과분한 상대임을 알지만 나와 맥심은 결혼을 하게 되고 콘월의 맨들리에 입성한다. 나의 맨들리 생활은 쉽지 않다. 모든 면에서 전처인 레베카와 비교당한다. 미모와 지성, 교양에 있어서 레베카는 나를 압도했단다. 그녀의 비서이자 친구이자 신봉자인 댄버스(주디스 앤더스)가 맨들리의 집사로서 실권을 쥐고 사사건건 나와 대립한다. 나는 레베카의 그늘을 벗어나서 이 맨들리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싶지만 만만치 않다. 그 와중에 전처가 사고 당했다는 보트가 떠오른다. 이에 레베카 사망사건의 재조사가 진행되고 나와 맥심은 위기체 처한다.
이 영화를 형식적인 면, 갈등의 측면, 인물의 측면, 사건의 측면에서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영화는 장소의 변화와 함께 로맨스 멜로, 스릴러, 써스펜스로의 장르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이처럼 장소와 장르의 변화를 중심으로 영화는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1) 프랑스 몬테카를로 고급호텔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반부는 로맨스 멜로극의 형식으로 흙수저 출신의 여인이 영국 최고의 금수저와 결혼하여 자신의 사랑을 성취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엮어진다. 여기서 몬테카를로는 평화와 낭만 아름다움의 세상으로 그려진다.
2) 영국 최고급 주택 맨들리에서 벌어지는 중반부는 호러 써스펜스 형식으로 사망한 레베카와 나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맨들리- 외부 이미지는 부와 아름다움의 상징, 내부는 음험하고 공포스러운 곳으로 묘사된다.
3) 바닷가 보트하우스 별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후반부는 범죄 스릴러 형식으로 레베카 사망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1) 나 vs 댄버스의 갈등
맨들리의 여성 집사인 댄버스는 맥심의 전처였던 레베카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이 대단하다. 댄버스는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레베카를 종교처럼 숭상하며 미모와 지성에서 한참 뒤떨어진 나를 경멸하며 맨들리의 안주인의 자격을 부정한다. 레베카에 대한 열등감 가득한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해 보지만 레베카의 벽은 높기만 하다.
이러한 갈등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유산과 현재와의 갈등을 의미하고, 권력욕망의 면에서는 맨들리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구세력과 신세력의 한판대결을 의미한다. 또한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실재와 이미지의 대립투쟁을 의미한다.
2) 맥심 vs 레베카의 갈등
레베카는 결혼 4일만에 자신의 사생활의 자유를 선언한다. 대신 헌신적인 부인처럼 연기해주겠으며, 영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커플로 인정 받을 수 있게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결혼 4일만에 이혼 할 수는 없는 법. 자신의 체면(이미지)을 위해 맥심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맥심과 레베카와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망의 갈등이지만, 맥심의 내적 갈등은 자신의 이미지와 본모습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3) 나-맥심 vs 댄버스-파벨의 갈등
레베카의 충성파인 댄버스와 파벨은 맥심을 레베카의 살인범이라며 몰아붙인다. 파벨은 레베카의 사존이자 그의 애인이다. 표면적으로는 레베카의 죽음을 둘러싼 살인이냐 자살이냐의 갈등이지만, 맨들리의 소유와 운영을 둘러싼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중반부까지 선하고 착하기만 하는 여인인 나, 신사의 품격을 지닌 맥심이 후반부에 악행을 옹호하고 은폐하는 인물로 둔갑한다. 지성 교양, 미모를 갖춘 레베카의 이미지도 후반부에 극적으로 바뀐다. 즉 이 영화에 이중적이지 않은 인물이 없다. 오로지 선한 인물도 없다. 오로지 악한 인물도 없다.
모든 인물이 선과 악을 겸비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선설과 성악설을 전복시킨다. 등장인물의 이중성은 본래의 나와 이미지의 나(사회적 자아), 가려진 나와 드러난 나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후반부는 레베카의 사망사건을 다룬다. 나와 맥심은 직접증거가 없다는 법의 맹점을 파고든다. 댄버스와 파벨은 런던의 산부인과 의사에게 진료를 정황증거를 들이대며 레베카의 자살을 부인하고 맥심을 살인범이라 지목한다. 그런데 파벨의 주장대로 런던의 의사에게 갔더니 뜻밖의 진료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이를 통해 경찰국장은 엉뚱한 결론을 내버리고 사건을 종결한다. 과연 인간은 실체적 진실에 도달 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사람 중심, 사건 중심, 시간중심, 갈등 중심, 대상의 객관성 중심, 이중 어느 요소를 강조 하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가 있다.
1) ‘나’를 중심으로 보면, 이 영화는 흙수저 출신이 금수저 맥심과 손쉽게 결혼하고 우여곡절 끝에 영국최고의 저택 맨들리의 안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을 그린 신데렐라 스토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 맥심을 중심으로 보면, 전형적인 영국 신사이던 맥심은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려다 후반부에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신의 본모습(본래의 자아)과 자신의 이미지(사회적 자아)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건을 중심으로 감상하면, 레베카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맨들리의 주도권 다툼을 그린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과거와 현재, 시간을 중심으로 보면, 이 영화는 레베카를 옹호하는 구세력 대 현재의 나의 대립투쟁을 그린 영화, 즉 현재와 과거는 독립 무관계가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끼치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5) ‘나’와 레베카의 갈등을 중심으로 보면, 이미 죽어 현존하지 않는 레베카는 이미지(=시뮬라크르)로만 존재하므로 실존하는 ‘나’와 시뮬라크르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 시뮬라크르의 공포스런 힘을 보여 주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6) 이 영화에서 레베카에 대한 이미지가 맥심과 맨들리 사람들간에 현저히 차이가 난다. 또 레베카 사망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에서 종결되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는 우리 인간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보편적인 인식은 가능한가를 묻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4) 5) 6)에 중점을 두어 영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만남에서 결혼까지
1935년경, 프랑스의 몬테카를로에서 ‘나’(조안 폰테인)와 맥심(로렌스 올리비에)은 만나 결혼한다. 이국 땅인 몬테카를로는 평화와 낭만, 안식의 장소로 그려진다. 영화에서 나는 이름도 없어 그저 나라고만 표현한다. 이처럼 나는 이름 없는 나로만 존재한다.
나와 맥심은 조건 면에서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다. 흙수저 출신에 부모님 마저 모두 돌아가시고 돈 많고 오만하며 교양 없는 호퍼 부인의 고용인으로서 그의 말벗과 잔심부름을 해주고 먹고살며, 미모도 별로고 스케치 외에는 뚜렷한 재능도 없는 그저 그런 여자이다. 그럼에도 행운은 이처럼 별 볼일 없는 나에게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부유층의 저명인사인 맥심을 만나 수다를 떨고픈 호퍼부인의 호들갑이 없었던들 나는 맥심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별다른 위기나 다툼도 없이 둘은 결혼에 골인한다. 거만하고 버릇없고 교양없는 고용주가 평생의 은인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둘은 화려한 결혼식도 생략하고 결혼신고만 한 채로 영국 맨들리로 돌아온다.
2) 감상
전반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눈에 띄는 것은 상류 재벌인 ‘맥심이 왜 보잘 것 없는 그녀를 선택했을까?’ 정도이다. 명백히 드러나지 않지만 전처인 레베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와 반대되는 여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교양과 지성 미모, 가문에서 탁월한 여인이었던 전처 레베카에 대한 반발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맥심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를 보호하려 한다.
중반부는 호러 써스펜스 형식으로 맨들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요 갈등은 형식적으로는 나와 여성 집사인 댄버스와의 갈등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실존하는 나와 실존하지 않는 레베카와의 갈등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물리치듯 댄버스는 레베카의 이미지와 비교하며 나를 괴롭히고 쫒아내려 한다.
이는 과거와 미래의 싸움, 구세대과 신세대, 기득권 세력 대 신진세력의 대립 갈등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실존인물과 이미지의 갈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나의 열등감
맨들리에 입성한 첫날 댄버스의 표정은 얼음장 만큼 차갑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서쪽방으로 나를 안내하며 그녀는 바다가 보이는 동쪽에는 레베카의 방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서재와 모닝룸엔 레베카의 일기 편지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물건마다 레베카의 이니셜인 R이 새겨져 있다.
맨들리의 사람들이 레베카와 나를 비교한다. 꽃가꾸는 법도 모르고, 말타 본적도 없고, 룸바춤을 출줄도 모르고, 보트도 탈줄 모른다고 은근히 핀잔주고 무시한다.
맨들리의 관리인인 프랭크는 레베카에 대해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라고 평가한다.
(2) 나와 댄버스의 갈등
레베카의 집사이자 친구였던 댄버스(주디스 앤더스)는 레베카가 죽은 후에도 그녀를 숭배하며 충성을 다한다. 남편인 맥심이 “댄버스 무서워 마오. 당신이 하녀 같구려” 할 정도로 ‘나’는 댄버스에 주눅들고 무서워한다.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레베카의 방에 들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샅샅히 살펴보는데 레베카가 불쑥 들어온다. 댄버스는 “멋진 방, 최고의 방이죠. 마님(레베카)의 취향이죠. 그날 밤과 달라진 것은 없어요. 드레스룸도 보고 싶나요? 주인님(맥심)께서 시도 때도 없이 비싼 선물을 했죠. 속옷들은 수녀들이 만들었고.. 유명인사들이 모두 마님을 좋아 했답니다. 가끔 복도를 걸어 가면 마님이 뒤따라 오는 듯한 착각이 일어요. 그 빠르고 경쾌한 발걸음, 이방뿐 아니고 집안의 모든 방에서..죽은 자가 돌아와 산자들을 지켜 보고 있는 거예요. ”
레베카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고 맨들리의 주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나는 남편의 승낙을 얻고 무도회를 개최한다. 이때 댄버스가 자신의 하녀를 시켜 드레스를 추천해 주었고,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나는 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등장한다. 맥심은 그녀의 드레스를 보고 격노하며 당장 벗으라고 화를 낸다. 그것은 레베카의 옷이었던 것이다. 맥심은 레베카의 망령이 살아나는 것에 경악을 했던 것이다. 이에 댄버스에 따져 보지만 댄버스는 시큰둥하며,
“같은 옷을 입어도 비교가 안돼요. 마님 자리를 차지하러 결혼 했죠?. 주인님(맥심)은 마님 돌아가시기 직후와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어요. 매일 밤 잠을 설치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려요. 마님 생각에 괴로운 것이죠. 레베카 집에 살고 그녀의 물건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 했겠지만 당신에게 벅찬 사람이예요. 싸움이 안돼요. 마님 보다 나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
이에 울부짖으며 그만 하라는 나에게 창문을 열어주며 댄버스가 협박한다.
“그냥 가버려요. 맨들리를 떠나요. 주인님은 당신이 필요없어요. 아직 마님을 잊지 못했죠.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마님을 생각하며 혼자 지내길 원해요. 더 머물 이유도 더 없잖아요. 내려다 보세요. 겁내지 말아요.”
집사 주제에 안주인에게 하극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녀의 이런 자만심의 근거는 무엇일까?
(3) 레베카의 존재 양태- 시뮬라크르(이미지)로 존재
영화에서 레베카의 실제 모습은 어느 장면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자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녀. 한편에선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또 한편에서는 공포 그 자체로 작용한다. 그녀는 전설이자 이미지로 존재한다.
레베카에 대한 맨들리 사람들의 평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마님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교양, 미모, 재치가 뛰어나고 승마 보트 춤등 못하는 게 없는 금수저-....등등이다. 레베카의 이러한 긍정적이고 강렬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맨들리의 안주인의 자격과 동일시 되고 숭배된다. 이처럼 레베카는 이름만으로 , 즉 이미지(=시뮬라크르)로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 사유에서 이미지-시뮬라크르는 무척이나 강조된다. 시뮬라크르론을 전개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학자는 플라톤, 들뢰즈, 보드리야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 요지는 차이가 있다. 이들 중 이 영화에 가장 타당한 시뮬라크르론은 어느 것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시뮬라크르(simulacre)는 ‘흉내 내다’, ‘짐짓 … 하는 체 하다’, ‘의태(擬態)하다’ ‘모의(模擬) 실험을 하다’의 뜻이다. 실제는 아니면서 실제와 비슷한 가짜를 말한다. ‘가짜’라는 의미의 시뮬라크는 한 마디로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이미지는 한자로는 상(像)이다. 책 속에 들어 있는 삽화, 화보, 그림 등을 이미지라고 한다. 탕웨이는 하나의 실체이지만 그녀의 사진은 이미지이다. 사진은 탕웨이와 비슷하지만 탕웨이 자체는 아니다. 탕웨이를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것 역시 이미지다. 조금 더 확장하여 탕웨이를 누군가가 묘사해 놓은 글이 있다고 하자. 그녀를 그대로 묘사했지만 탕웨이 자체는 아니다. 그것 역시 이미지이다. 이처럼 이미지는 원본과 아주 비슷하지만 결코 원본과 같지 않은 가짜다. 사진이나 그림에서 보듯이 이미지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재현, 모방한다는 점에서 흉내 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시뮬라크르의 일종임이 분명하다.
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을 머릿속에서만 그려 보는 것이 상상이다. 또는 실현되었더라도 이미 지나가 과거 속에 들어간 것은 지금 현재의 실재가 아니므로 이것 또한 상상(이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과거에 실현되었다가 지금은 더 이상 없거나, 혹은 미래에 실현될, 그러나 아직은 없는 것은 모두 상상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 이게 바로 시뮬라크르다. 가상현실은 컴퓨터라는 인공적인 기술로 만들어낸, 실제와 유사하지만 실제가 아닌,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가 세계를 완벽히 묘사, 지시할 수 없듯이(언어지시설 부인), 사유가 언어로 완벽히 표현해 낼 수 없듯이, 사유가 객관 대상을 완벽히 그려 낼 수 없듯이, 우리가 어떤 사물의 개념을 완벽히 정의할 수 없듯이, 이미지 역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완벽히 재현(=모사=모방)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 전통 철학은 이러한 시뮬라크르-이미지를 어떻게 다루어 왔을까?
1)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현상계는 이데아계를 분유하여 본따서(=모방 =모사 =재현)하여 만들어진 세계다. 침대의 예를 들어보자. 침대의 이데아- 현실의 침대- 침대의 그림- 세계는 이처럼 위계질서가 성립한다. 즉 플라톤에 의하면 유일하고 영원불변한 침대라는 이데아가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데, 우리 인간은 이 침대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침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침대 이데아는 원본이자 진짜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침대는 사본이자 가짜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침대를 모델로 하여 사진이나 그림을 그린다면 이는 시뮬라크르(=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침대의 시뮬라크르는 가짜의 가짜인 셈이다. 이건 겉모습이 침대와 똑 같거나 비슷하다 해도 원본인 침대의 이데아에서 3단계 내려와 있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가짜 모사물일 뿐이다. 플라톤이 재현과 모방이 본질인 미술과 시를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처럼 플라톤은 원본만이 가치있고 존중되어야 하며 일체의 시뮬라크르는 일시적이며 덧없는 것으로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들뢰즈의 플라톤 비판
들뢰는 플라톤의 진짜 핵심은 이데아와 현상계의 구별이 아니라 현상계 내에서 이데아와 닮은 것들 vs 닮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여 전자를 숭상하고 후자를 배척한다데 있다고 강조한다. 즉 특정한 기준에 맞는 사람들(이데아와 닮은 사람들)에게는 권위를 부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데아와 닮지 않은 사람들)들은 배제하고 차별하는데 플라톤 철학의 근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의의 이데아와 닮은 사람은 그 닮음(=모방=재현= 카피) 때문에 정의롭다고 불릴 자격이 있다. 반면 이데아와 닮지 않은 것들은 시뮬라크라 부른다. 정의의 이데아와 닮지 않은 사람은 그 닮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정의롭다고 불릴 자격이 없다며 무시하고 차별하게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론은 우리 인간은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불가능한 숙제를 부여함과 동시에 현실에서 이데아를 닮은 것은 존중하고 이데아와 닮지 않은 것은 차별 배척하는데에 중점이 있다.
3) 댄버스의 경우
댄버스는 레베카의 이미지는 원본과 닮은 것, 나의 이미지는 원본과 닮지 않은 시뮬라크르로 간주한다. 그런 연유로 댄버스는 레베카를 신처럼 추앙하고 존경하며 나를 가짜의 가짜라 여기며 가치없는 것, 맨들리로부터 쫒아내야 할것으로 간주하고 구박하고 차별한다. 댄버스는 현실에서 이데아와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전자에 부당한 특권을 부여하고 후자를 부당하게 차별하는 철저한 플라톤 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론에 부합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플라톤과는 정 반대의 입장에서 시뮬라크르를 옹호한다. 가장 큰 차이는 이데아에 대한 입장에서 비롯된다. 들뢰즈는 애초에 이데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시뮬라크르는 원본에 종속된 복사물이 아닌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가진 실재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자, 세상을 다양화 하고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행위를 시뮬라시옹 이라한다. 시물라시옹은 환영이지만 사람을 기만하는 의미 없는 환영이 아니라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시뮬라시옹은 원본에 지배를 받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시뮬라크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성 차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닮음(동일성)을 기준으로 판별하여 차별했지만 들뢰즈는 차이를 기준으로 판별하여 그 독창성과 창조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닮음을 기준으로 삼으면 반드시 서열과 클래스(위계 계층)를 설정하게 되고, 그 서열이나 클래스 안에서도 닮음에 부합하느냐를 기준으로 서열을 나누게 된다. 모든 서열은 닮음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에 기초한다. 시뮬라크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과도 닮지 않은 것, 아무런 원본도 상정되지 않은 것, 아무런 기준도 상정되지 않은 것이 바로 시뮬라크르 이다.
2) 영화의 경우
이 영화가 들뢰즈의 시뮬라크론과 부합하려면 레베카의 이미지는 그녀의 유산을 뛰어 넘는 긍정적인 이미지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의 이미지는 나를 숨이 막히게 하고 공포를 유발한다. 또한 레베카를 지키려는 댄버스 역시 사려깊고 포용력있는 모습이어야 하나 음험하고 괴기스러운 그녀의 모습과도 맞지 않다. 따라서 이 영화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론과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1)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1929~2007)는 1981년 그의 저서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시뮬라시옹(simulation)>에서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 이론을 이야기하고, 더 이상 모사할 실재가 없어지게 되면서 실재가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초과 실재)가 생산된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포스트 모던 시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젠 사물 자체의 기능은 중요하지 않다. 사물이 지니는 이미지(시뮬라크르)가 중요하다. 이른바 기호가치-소비시대이다. 벤츠, 타워필리스, 루이비통 가지고 다니는 것은 소비하는 동시에 나의 귀족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즉 소비가 생산한다. 이로써 전통적인 소비와 생산의 경계가 무너진다. 셩형수술 역시 소비가 아닌 투자이며 생산이다.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생산과정인 것이다. 이처럼 기호가치의 소비는 소비이면서 생산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물이다. 시뮬라크르는 흉내 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시뮬라크르는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하나의 현실이 된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바로 이 비현실인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오게 된다. 흉내 내거나 모방할 때는 이미지라는 실제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시뮬라크르)를 따라가야 한다.
예컨대, 몇해 전에 유행했던 TV 프로그램인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 출연자는 실제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실제 결혼보다 더 결혼한 부부 같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실제 부부처럼 행위한다. 또 인터넷 까페에서 어떤 아이디로 활동하게 되면 그 까페에서 우정과 사랑을 쌓고 때로는 싸움을 하는 등, 인터넷상의 세계가 실제 세계보다 중요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실재가 아닌 것을 실재로 믿고 사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삶에서 실제 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티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실재를 부정해야한다. 이미지로 사는 여배우는 맨얼굴을 보여주면 안되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영화, 트르먼 쇼, 그리고 매트릭스에서 시뮬라크르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는 아예 원본과 상관없이,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힘을 갖는 하이퍼 리얼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원래 실재의 반영인데, 이것이 반복되면 이미지는 실재를 감추고 변질 시킴으로써. 이미지는 실재와 관계를 가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뮬라크르는 반영 – 왜곡 – 독립의 단계를 거쳐 하이퍼 리얼리티세계로 진입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되면, 하이퍼리얼리티가 끊임없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모든 것이 기호화 되고 모든 실재가 사라지는 단계에 진입한다. 실재가 이미지와 안개의 기호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들뢰즈와 푸코가 시뮬라크르의 밝은 측면과 경쾌한 삶의 환희를 말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의 어두운 측면과 디지털 시대의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있다.
2) 영화의 경우
레베카의 이미지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 지성, 매너, 품위가 뛰어난 완벽한 여성이다. 남편인 맥심에 의하면 그녀의 실체는 그렇지 않다. 절제할 줄 모르고 타락한 이기주의, 쾌락주의자 일 뿐이다. 그럼에도 한번 굳혀진 레베카의 이미지는 반영- 왜곡-독립의 단계를 거쳐 거의 신격화의 경지에 다다른다. 레베카의 실재와는 무관하게 실재와는 독립하여 맨들리 사람들을 지배한다. 댄버스와 맨들리 사람들은 레베카의 기호가치를 소비하며 자신의 고귀하고 숭고한 이미지를 생산한다. 레베카의 이미지에 근거, 레베카는 선, 진짜, 원본이 되고, 나는 악, 가짜 사본 취급을 받는다. 이처럼 이 영화의 레베카 이미지는 보들리야르의 이론에 부합한다 하겠다. 물론 이 영화는 1940년대 나와 1980년대 보들리야르의 이론보다 한참 앞서지만 시대를 앞서 나가며 시뮬라크르의 힘을 간파한 작품으로 보인다. 아카데미 작품상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후반부는 바닷가 별장을 중심으로 레베카의 사망사건을 다루는 범죄 스릴러로 구성된다. 레베카의 사망이 자살인가? 타살인가? 자살이라면 그 이유나 동기는 무엇인가? 혹은 타살이라면 살인범은 누구이고 살인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것이 후반부를 이끌어 나가는 동력이다.
레베카가 죽은 지 1년, 그녀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보트전복 사고로 알려졌다. 향해 실력이 뛰어났지만 레베카는 뱃놀이를 하다가 돌풍에 휘말려 보트가 전복됨으로써 사망했다고 인정되었고, 사고발생 2달 후 그녀의 시신을 찾아 장례식을 치루고 납골당에 매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바닷속에 잠겨있던 레베카의 보트가 떠올랐고 잠수부에 의해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아울러 보트의 밑바닥에 누군가 인위적으로 구멍을 뚫은 것이 발견됨으로써 사고가 아니라 사건의 가능성, 자살 혹은 살인의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사망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레베카를 보는 시선, 즉 레베카에 대한 이미지가 사람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확인된다. 남편인 맥심이 보는 레베카에 대한 이미지와 맨들리 사람들이 보는 레베카의 이미지가 극과 극을 달린다.
또한 레베카 사망사건의 각종 정황증거와 직접 증거등을 경찰국장과 맨들리 사람들이 공유하면서도 주장은 제각각이다. 나와 맥심은 레베카의 자살을 주장하고, 댄버스와 레베카의 불륜 남이었던 파벨은 맥심이 저지른 살인사건이라 주장한다. 이와중에 경찰국장은 여러 증거와 증언을 듣고도 엉뚱한 결론을 내려 버린다.
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사람마다 이미지가 다르고 사실관계를 보는 시각이 다를까?
도대체 우리 인간은 사람과 사물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인식은 가능한가가 문제된다. 이에 대해 객관적 보편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전통철학적 입장과 인식은 언제나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훗설의 현상학이 대립한다. 이에 이 영화는 어느쪽의 입장에 섰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인식과 대상, 사유와 객관 세계가 일치하는가? 예컨대, 우리는 사과나 태양계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히 알 수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사실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있는가? 이는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의 문제이다.
전통형이상학은 사유=언표(언어)=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즉 우리의 사유는 정확히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으며 또한 사유는 존재를 올바르게 묘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과나 태양계, 어떤 사람이나 사실에 관해 정확히 사유(=정신)로서 인식할 수 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유=존재이려면 필연적으로 신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모든 존재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객관적 존재를 사유할 수 있는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존재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신이다. 또한 사유=존재이면 사유가 자율적 창조적 능동적 자유라는 성격을 갖는다면 존재 역시 자유가 있어야 한다.
전통입장은 사유(=인식)와 언어의 관계에 관하여 언어는 인식의 도구(인식도구설)라고 주장한다. 언어는 사물을 인식하는 수단이므로 언어에는 사물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다. 이는 언어 안에 사물에 대한 진리가 담겨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의식은 항상 투명하게 사물의 본질을 추상해 낼 수 있고(즉 사유=언어이기에) 이것을 언어라는 그릇안에 생생하게 담아 낼 수 있다고 전통철학자들은 주장한다.
또한 언어와 존재(=대상)의 관계에 관하여 전통철학은 언어지시설을 주장한다. 언어와 대상(사물,객체)은 1대 1대응하며 지시체가 그 언어의 의미라는 것이다. 문장이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처럼 언어도 어떤 사물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 실증주의의 입장으로 지시체를 갖지 않는 언어는 비과학적인 언어로 간주된다. 예컨대, “인간의 존엄성” 이라는 언표는 실재의 세계(이데아의 세계)에 그 대응물이 있으므로(존엄한 인간의 이데아 형상, 보편)참인 명제가 된다. 또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도 이데아의 세계, 실재의 세계에 대응물이 있으므로 진리가 된다. 이처럼 이데아론, 진리에 대한 대응설, 언어지시설이 짝을 이룬다. 만약 지시물이 실재의 세계에 없으면 그 언어는 거짓인 언어가 된다. 따라서 언어로서 사물에 내재한 진리, 본질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전통철학의 입장이다. 요약하면 인식도구설과 언어지시설을 주장하는 전통철학적 입장은 사유=언어= 존재의 일치를 전제로 사유의 언어로서 사물의 실체를 보편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 물질은 연장있는 실체라 주장한다. 이처럼 주체(=정신)와 객체(=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라면, 그리고 이성과 경험으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의 대상(사과, 태양계, 사실)에 대한 모든 견해는 서로 일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체라는 의미는 그 어떤 것의 도움 없이도 자족적인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므로 거기에는 스스로 완벽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이 사유하는 실체라면 그 사유는 사물을 온전히 인식해야만 한다.
이에 근거하여 데카르트는 신이 보증하기에 사유와 존재는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의 사유에는 본유관념이 있는데, 그 본유관념은 이데아계의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사유(정신)안에는 존재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으므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사유=존재에 도달하게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존재에 대한 모든 진리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사고는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뉴턴 역학으로 자연세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알 수 있다는 지나친 낙관론까지 등장한다 (라플라스의 악마)
칸트에 의하면 물자체의 세계는 우리가 알 수 없으므로 이를 제외하고 현상계만 한정한다면 우리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감성형식(시간, 공간)과 오성형식(12범주)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므로 인간 모두에 타당한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하는 돌멩이 그 자체(물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면 적어도 하나의 돌멩이가 인간에게 보이는 방법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사과, 태양계, 어떤 사람의 이미지, 어떤 사실에 대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헤겔은 칸트의 인식 주체-물자체의 도식은 정적인 이해 방법이라며 이를 배척한다(물자체를 알 수 없다는 칸트를 부인하고). 양자(주관- 객관)는 변증법적 동적 관계이므로 주체로서의 인간은 대상 사물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인식을 심화시켜 결국 세계 전체를 다 알게 되는 절대지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의 세계도 결국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궁극에는 다 인식할 수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작용으로 결국 우리는 사유=존재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사물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으면서 인식을 발전 시키면 최종적으로 세계의 객관적 존재를 모두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위 영화는 사람에 따라 레베카의 이미지가 다르고, 정황증거와 직접증거에도 불구하고 경찰국장은 실체적 진실에 이르지 못하고 자살로 마무리 해 버린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해답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이 개별적 주관적 파편화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이 영화는 데카르트나 칸트 헤겔등 전통철학적 입장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유=존재에 도달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은 로크 흄등의 경험론자들에 의해서 제기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주먹구구식이어서 인식과 객관물이 일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험에 대한 불신이다. 잘 알다시피 경험은 오류투성이에 필연 법칙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이이유로 인간의 경험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밖의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후설은 의식의 본질을 통해 사유를 통해 존재의 보편성에 도달할 수 없음을 밝힌다.
1) 훗설
사유= 언표이지만 사유는 존재를 완벽히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돌멩이 자체를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돌멩이에 맞고 나서 아프다는 경험을 타당하게 언표(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훗설은 진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미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 그 자체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없지만 의미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2) 데리다
데리다는 우리의 사유를 정확히 언표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훗설을 반대한다. 즉 훗설은 사유=언표는 성립한다는 입장이나 데리다는 사유-언어-존재 모두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아나운서가 한국과 브라질의 월드컵 경기를 중계한다 가정해 보자. 아나운서들이 한국과 브라질 경기의 모든 사항을 사유할 수 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사유=언표= 존재가 성립한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아나운서들은 손흥민 이강인등 주요 선수의 행위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 그것도 선수들의 외형만을 묘사 할 수 있을 뿐, 전체 경기장 모든 것을 다 인식할 수도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아무리 아나운서가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사유로서 자연 존재들을 다 표현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과욕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즉 훗설과 데리다는 사유와 존재의 불일치를 논증함으로써 인간세계에서 만큼은 객관적 보편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셈이다.
여기서는 훗설의 현상학에 대해 살펴보자
1) 판단중지-객관세계 인식의 불가능성
후설은 인간의 인식은 원래 제한 된 것이기(사유와 존재 불일치) 때문에 인간의 인식과 객관세계는 완전한 인식은 영원히 불일치한다. 이러한 이유로 후설은 판단중지를 호소한다. 객관적 세계와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의식이 있는데 거기에서 객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차단 (판단중지)하면 주체의 의식만 남게 된다. 그는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나 의식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현상학에서의 진리란 객관물이 아니라 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객관세계에 대한 판단중지한 후 훗설은 의식의 탐구에 집중한다.
2) 의식
훗설은 의식이야 말로 아르키메데스의 기점, 즉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하고 확실한 점이라 주장한다.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밝음의 장은 바로 의식이다. 의식을 초월해있는 사물은 항상 그늘지고 은폐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예컨대, 뱀은 사악한 것, 조수간만의 차는 만유인력에 의한 것, 이집트는 나일의 선물, 고요한 아침의 나라,등등 뱀과 강, 달 조선, 나일강의 순수한 모습이 아니라 어떤이데올로기나 과학적 사고에 의해 편향되고 은폐되어 있는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오염되고 은폐된 것을 의식속에서 밝게 현상(Phanomen)해내어 참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곳이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흐름의 구조이다. 컴퓨터를 지각하다가 문득 옛애인을 기억하고 그녀와 실지로 만난 상상을 하다간 다시 컴퓨터에 대한 지각으로 돌아오는 짧은 의식의 여행속에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지각이든 기억이든 상상이든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의식의 지향성이다.
이처럼 지각한다는 것은 대상을 단순히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찰이 아니라 그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는 사유작용이다. 어떤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각의 대상이든 그 밖의 기억이나 상상등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이미 주관에 의해 해석되고 사유된 대상이지 주관 밖의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3) 의식의 지향성(intention) 노에시스(Noesis) /노에마(Noema)
지향은 의식이 대상과 거리를 두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찰적 지향(指向)이 아니다. 지향은 이성보다는 본능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배려이며 사랑이다. 이처럼 지향은 의식의 대상에 대한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관계이다. 대상은 의식의 지향을 부추기는 끌어당김이나 밀어 젖힘등의 촉발작용의 주체이다. 예컨대, 우리의 의식이 신문을 지향한다 생각해 보자. 신문이 단순히 우리의 감각속에 들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씩씩했던 그 성실했던 삶의 의미체로 각인된다. 또 한잔의 칵테일을 객관적 사물로 바라 볼때는 일정한 분자 및 화학적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칵테일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은 그와는 다르다.(향취, 흥분감등) 그녀의 눈물은 과학적 분석하는 것과 그녀의 눈물의 의미는 분명다른 것이다.
이처럼 지향은 단순 모사가 아니라 의식 나름의 해석작용이다. 즉 객관은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인간의 해석이 입혀지지 않은 사실 내지 객관은 없다.(해석학에 영향) 지향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사물마다 개인마다 의미가 다르다. 이렇게 하여 진리는 개별적, 주체적 진리가 된다. 이런 이유로 절대적 보편적 진리는 부인되며, 보편성을 근간으로 하는 본질 역시 부인된다. 변함없는 실체성 역시 인정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다. 같은 환경이라도 의미가 다르다. 이것이 실존의 의미이다. 인간이 처한 환경은 사람마다 다르다.(실존주의에 영향) 이렇게 하여 진리는 의미론으로 바뀐다. 지향은 현상학적 진리를 산출한다. 본질직관이 바로 지향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경험에 근거한 본질직관에 의해 산출된다.
작용으로서의 의식(노에시스)은 항상 자신에 의해 구성되고 의미지워진 대상(노에마)을 자신의 상관자로 가진다. 대상은 이미 의식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어져 있다.
4) 사실-의미지향에 의한 해석 없이는 어떤 사실도 존재치 않는다.
사실(fact)은 하늘에서 떨어진 실재가 아니라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인거나 간에 이미 ‘사실로서 구성된 것’이다. 즉 우리에 의해 의미 있는 것으로서 해석된 것이다. 의미 지향에 의한 해석없이는 어떤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의 객관성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대상은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주관과의 관계속에서 의미지워진 것으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현상하는 것이고 현상한다는 것은 의식에 현상한다는 것이며, 의식에 현상한다는 것은 의식에 의해 의미지워진 것이라는 말이다.
영화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도 제각각, 범죄 사실에 대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다.
1) 맥심의 고백
레베카의 시체가 떠오르자 이를 추궁하는 나에게 맥심은 고백을 한다.
“잠수부가 발견한 것은 레베카가 맞소. 납골당에 있는 시체는 레베카가 아니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여자였소. 난 레베카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소. 선실바닥에 누운채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맥심은 자신이 레베카를 살해 했음을 고백한다.
2) 사건의 원인- 레베카의 이미지
나는 레베카 살해의 이유를 남편에게 묻자
“내가 레베카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믿었소?...나는 그녀를 증오했소.. 물론 처음엔 푹 빠졌지. 매혹당했소. 그녀와 결혼하자 모두들 가장 운좋은 사내라 하더군. 교양있고 유쾌 했었지. 교양 지성 미모 모두 갖추었지. 하지만 한순간도 행복하지 못했소....몬테카를로 절벽 기억하오? 레베카와 신혼여행 갔던 곳이오. 결혼 4일만에 모든 것을 털어 놓았소.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서 제안하더군.(자유롭게 연애하며 살겠다고) 헌신적인 부인처럼 연기해 주겠다고 하더군. 영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커플로 유명해 지자 하더군. 그따위 제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데 난 받아들이고 말았소. 그땐 젊고 가문의 명예를 중시했으니.. 그 여자는 우리가 이혼법정에 서느니 다른 것을 희생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
레베카는 유부녀 이면서도 본분을 지키지 않고 남자들을 마음껏 사귀었고 맥심은 이를 묵인해 주다가 임계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레베카는 조심성이 없어졌고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놓고 며칠씩 보내다 오고 심지어 맨들리까지 끌여들였던 것이다. 파벨도 그중 하나의 남자 였던 것이다.
그런 추잡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맥심은 두 사람을 떼내기로 결심하고 레베카를 추궁하자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도발을 한다.
“내가 아이를 가지면 아무도 당신애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 못해. 당신의 소중한 맨들리를 상속받을 애를 갖고 싶지? 완벽한 아내역에 완벽한 엄마역도 자신있어. 아무도 모를거야. 그애가 크고 당신이 죽은 후 그가 맨들리 주인이 되면 당신 피가 끓겠지? 맥심 이젠 어쩔테야?”
이에 정신이 혼미해진 맥심이 연장을 들고 그녀를 쳐버렸고 그녀는 사망해 버린다.
이처럼 레베카의 이미지에 대해 남편과 댄버스는 극과 극을 달린다.
3) 사건의 조사와 해결과정
맥심으로부터 살인의 고백을 들은 나는 진실을 은폐하고 남편을 보호하려 한다. 댄버스는 레베카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맥심을 코너로 몰아간다. 댄버스와 한패인 파벨은 레베카가 사망한 날 런던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간 사실을 들어, 레베카의 불륜 임신 사실을 알고 맥심을 살인범으로 지목한다. 이에 경찰국장과 맥심 파벨은 런던의 의사를 찾아가지만 뜻밖의 사실을 알아낸다. 레베카가 임신 때문에 진료 받은 것이 아니라 말기 암에 걸려 치료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경찰국장은 레베카의 자살로 결론 내 버린다.
여러 정황증거와 직접 증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살인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다. 증거 법정주의의 한계로 볼수 도 있지만 인간 인식의 한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와 맥심은 맨들리를 잃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4) 레베카에 대한 이미지가 사람마다 다르고, 실체적 진실을 두고 여러 견해가 대립하다가 엉뚱한 결론으로 끝나버린 것은 전통 철학적 입장보다는 객관적 보편성을 부인하는 후설과 데리다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명작의 요소를 고루고루 갖추고 있다. 해석의 여지가 그야말로 열려있다.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선과 악의 경계를 넘는다. 실존인물과 시뮬라크르의 대결도 무척 신선하다.
80여년이 지났지만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는 볼 때마다 새롭다. 이런 명작을 무료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유튜브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