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여론의 민낯과 공리주의의 슬픈 얼굴
이 영화는 하와이 행 비행기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 테러를 당한 승객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치료 할 것인가를 다룬 영화이다. 이러한 내용을 전반부는 비행기 테러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범죄 스릴러로 구성하고, 후반부는 전염병에 노출된 비행기 승객과 이를 다루는 대중들의 태도를 조명해 보는 재난물 장르로 편집한다.
감독은 민주국가의 민낯과 함께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여론의 한계와 공리주의 슬픈 얼굴을 보여주며 이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열린 토론의 장을 마련해 준것이다. 하지만 감독의 치열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영화는 주제의 논리적 일관성, 개연성등의 문제와 비현실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여러가지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 장르에서 갑자기 돌변하여 사회의 윤리관과 철학의 타당성을 조명해 보는 사회비판 영화로 성격이 변화한다. 한 영화에서 장르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들 수 있다. 기생충은 가족물, 코믹물, 범죄물, 공포물로 다양한 장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제가 일관되기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휩쓸 수가 있었다. 장르가 변화하더라도 주제의 일관성이 유지 되고 긴장을 한층 강화시키는 기생충과는 달리 이 영화는 장르의 변화가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섣부른 장르의 변화는 이 영화처럼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 즉 주제의 연속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이는 오락영화를 보러 왔다가 갑자기 예술 영화를 보는 황당함에 젖을 지도 모른다. 또 어떤이는 한 영화관에서 서로 다른 두 영화를 본 듯한 떨떠름한 느낌을 지울 수없을 지도 모른다. 이는 인간의 언어구조가 한 문장에서 모순된 두 낱말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춥고 덮다. 나는 오래전 지금 일어났다. 등의 문장은 허용되지 않기 보다는 이해 불가능한,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문장들이다.
한 영화에서의 이러한 단절감은 범죄스릴러 장르를 너무 일찍 끝내 버린 것, 즉 극중 범인인 진석(임시완)을 너무 빨리 사망하게 해버린 것과 관련이 깊다. 범인이 사망해 버림으로써 그 범행의 원인이라 든지 범인과의 대결을 기대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고 감독은 무엇에 쫒기듯 재난물 장르로 돌진하고 말았다. 감독은 범인과 암투와 범행의 전모를 영화 끝까지 끌고 가면서 승객들 치유 대책을 마련하는 이중 전략을 써야 마땅 했다. 그랬더라면 범죄 스릴러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멋진 영화가 되었을 런지도 모른다. 아쉬운 점이다.
1) 테러
진석(임시완)은 치명적인 전염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천식 예방 도구에 넣고 화장실 안에서 자신의 겨드랑이를 찢어 그 도구를 숨겨 출국 심사대를 통과한다. 비행기에 오른 그는 화장실에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천식 예방 도구를 풀어 바이러스를 객석 전체에 살포한다. 승객들은 하나 둘씩 스러져 간다.
그런데 비상선언은 이전의 하이재킹(비행기 납치)를 다루던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를 납치하여 돈이나 정치적 요구사항을 관철하려던 이전의 하이재킹 영화들과 달리 유진석(임시완)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또 그는 아주 쉽게 붙잡혀 버린다. 비행기 테러의 범인, 수법, 그 결과는 이제 밝혀졌기에 관객은 당연히 범행의 원인 내지 동기와 목적이 이제 밝혀지겠지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기대를 야심차게 배반한다.
2)인과관계의 문제
대개 범죄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불만 내지 재물욕이거나 정치적 욕망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진석에게는 뚜렷한 원인도 목적도 없다. 비행기 회사나 비행기 안에 원한이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추궁에 진석은 자신은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전부 죽었으면 좋겠으며, 거기서 쥐새끼들처럼 살아남으려고 하는 모습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묻지마 살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소시오 패스라 부른다. 미국물을 먹은 최고 금수저 지식인으로서 어머니의 가혹한 가정교육에 대한 반발심,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그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싸이코 패스라는 설명으로 퉁쳐 버린다. 그저 죽고 싶고 죽이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맹목적 반사회성, 맹목적 악마성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 증오범죄는 현실에 많이 있지만 그것은 영화적 소재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보는 이유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탐구하고 거기에서 감동을 받으려는 이유가 큰데, 아무런 원인이 없으며 그저 이런 증오범죄가 있었다고 퉁치는 것은 사랑없는 결혼 만큼이나 의미없고 위험한 일일 것이다.
3)개연성의 문제- 왜 비행기 인가?
진석의 주장대로 맹목적 악마성이 원인이고 그저 사람을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싶었다면 그는 왜 굳이 비행기를 선택했을까? 치명적 살상무기인 바이러스가 있고, 비행기 보다 더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장소, 이를테면 고층 빌딩, 대형 공연장, 전철등의 장소가 널리고 널렸는데...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쾌락을 느끼는 그런 악마가 자신도 죽는 것이 분명한데, 자신이 죽는 것이 그리 급했을까? 진석이 비행기를 선택한 개연성을 찾을 수가 없다. 비행기에 대해 원한이 있다거나 필연적으로 비행기를 선택해야할 이유가 절실하지 않다. 진석의 악마성과 반사회성 그리고 비행기가 개연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감독의 필요상 우연히 비행기를 선택했다고 밖에 보여 지지 않는다. 영화나 소설에서 우연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게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며 막을 내린다.
테러범 진석이 죽고 나자 영화는 갑자기 사회 재난물로 둔갑한다. 범행의 원인과 그 대책은 사라져 버리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행기 승객들을 어떻게 치료하고 어떻게 대우하느냐?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 과정에 미국과 일본 한국민의 대응이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1) 미국 일본의 대응
진석이 퍼뜨린 바이러스가 치명적이라는 점, 백신이 아직 없다는 점을 들어 미국과 일본은 자국내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국제법과 관련 조항을 모르기는 하나 감독의 지나친 오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 이런 위급한 상황이 있다면 미국과 일본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착륙을 허가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리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아무 관련없는 미국과 일본을 끌여들여 붚필요한 증오심을 자극한 것은 감독의 커다란 패착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본 미국인과 일본인이 어떤 느낌이 들까? 분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이런 식의 접근은 찬성할 수 없다. 이처럼 비상상황이면 미국이건 일본이건 아프리카 그 어느 나라 건 비상착륙은 허락할 것이고 그들을 봉쇄한 상태에서 치료해주는 것이 국제법과 인도주의 견지에서 타당한 것이다. 국가이기주의의 냉혹함, 또는 민주국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심정은 이해 가지만 미국과 일본에 맹목적 적대감을 심어주었다는 비난에서 감독은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2) 한국 정부와 국민의 대응- 공리주의의 문제점
한국정부와 다수 국민 역시 치명적인 전염병 덩어리인 비행기의 착륙을 거부한다. 집단이기주의에 휩싸인 그들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죽음을 요구한다. 전염병에 걸린 비행기 승객은 쓰레기 하치장 같은 NIMBY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 철학, 그 철학을 이어 받아 다수결 원리를 기반으로 한 여론 정치, 민주주의의 원칙상 당연한 것 이리라. 전염병 걸린 승객들은 최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국민일 뿐이다. 이처럼 공리주의와 민주주의는 철저히 소수의 피를 먹고 자란다. 철저히 소수를 짓밟고서야만 활개를 펼 수 있는 철학이고 원리이다. 공리주의의 슬픈 얼굴이자 민주주의의 민낯인 셈이다.
감독은 이점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기획한 의도인데 이점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3) 승객의 대응
이러한 고국의 정부와 여론에 절망한 비행기의 임시기장 재혁(이병헌)은 전래 없이 착하기만 한 승객들의 중지를 모아 착륙을 거부하고 공중에서 죽음의 비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연료가 떨어지면 비행기는 추락하여 전원 사망 할 것이 분명하다. 목숨을 건 행위인데도 어쩐 일인지 승객들간의 갈등도 없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승객이 하나도 없다는 것, 다수를 위해 소수가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살을 하겠다는 이 위대한 결단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승객들은 이타주의의 화신이란 말인가? 순자의 성악설을 폐기 처분해버린 듯한 위대한 승객들의 참 가상한 결단이나 현실성 없는 영화적 결단임이 분명하다. 승객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가족에게 유언을 보내는데 슬프기는 하되, 좀 어처구니가 없는 신파라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영화는 비행기 승객을 구조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나 두가지 문제점을 노출한다.
1) 현실성, 개연성의 문제
백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구인호(송강호)는 스스로 바이러스를 자신의 몸에 주사하여 병에 걸리고 치료제를 맞는다. 이처럼 내놓은 해결책이라는 것이 구인호(송강호)의 비현실적인 개인적 결단이다. 보통의 개인적 영웅이 재난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백신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 아내와 비행기 승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전염병에 걸린다는 설정. 그 고귀한 결단에 어마무시하게 감동해야 하는데 왜 이리 헛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비행기는 공중에 떠다니며 연료가 소진되어 가는데 그 짧은 시간안에 병에 걸리고, 치료제를 투여하고, 몸이 회복되고.. 백신과 치료제의 안전성을 증명한다는 발상은 아무리 영화지만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성이 없을 뿐더러 개연성도 없다. 비행기가 착륙되어 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해 줄수도 있으나 이 모든 과정이 연료가 떨어져 가는 비행기가 공중에서 맴을 도는 사이 해결한다는 시나리오는 도대체 누가 썼단 말인가? 감독은 이를 정녕 승인했다는 말인가? 현실성은 없어도 개연성은 충만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 텐데 너무나 한심한 시나리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극적인 효과만 노리다 현실성과 개연성을 잃어 버린 것이다.
2) 공리주의의 대안 제시 실패
결국 구인호는 스스로 병에 걸리고 치료제를 투여하여 회복한다. 이에 국토부장관(전도연)은 비행기 착륙을 허가하여 승객들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모든 관객의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구인호의 계획은 착착 맞아들어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하고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해결책은 좀 어이가 없다. 졸렬하기까지 하다.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으면서도 공리주의 내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 있다. 이는 현실성과 개연성이 부족한 것보다 감독의 철학의 부재로 보인다.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감독의 입장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졸렬한 결말을 내놓은 이 영화가 다소 실망 스럽다.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더 큰 듯하다.
5.
공리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점은 소수, 약자의 보호이다. 이 문제에 칼을 빼들었으면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상착륙시키고 그들을 치료해야만 했다. 의무의 수행이라는 거룩한 명제를 명분삼아서. 다수의 공리도 중요하지만, 다수의 의무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들도 우리 국민이고 우리 가족이기에 치료하고 살려야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의 수행, 그 의무가 아무리 불리하고 어렵더라도, 그 자랑스런 의무를 수행하는 정부이고 국민이어야만 그런 다수에게 희망이 있는 법이다. 이 처럼 공리주의에 대비되는 의무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던지 아니면 감독 나름의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 했어야만 했는데 공리주의 내에서 해결책을 찾는 바람에 영화의 설득력이 떨어진 듯하다.
공리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패기 있는 도전은 훌륭했지만 감독의 역량과 철학의 부재가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은 영화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