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한 걸음만 더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까 봐
'지금 내가 존재한다. 그것도 아주 무탈하게'
나를 세뇌시키는 씨앗을 하나 심었다.
가끔 물을 주는 걸 깜빡해서 성장 속도가 더딘 것 같지만,
조금씩 싹이 트고 있는 걸 보면 내가 나의 하루를 잘 키워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불쑥 불안함이라는 잡초가 솟아 나온다.
똑같이 물 주는 걸 깜빡하는데도 어찌나 생명력이 강한지
행복의 씨앗보다 더 크게 자라서 행복이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면접 때 자신의 강점으로 한 번도 피력해 본 적은 없지만,
나의 가장 큰 장점은 '힘들 때 술·담배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늘 즐거울 때만, 축하할 일이 생길 때에만 맥주 한 캔 정도 마신다.
아빠를 닮아 주량이 아주 센 편인데도 불구하고
반지하로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어제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전화가 왔다.
똑같은 벨소리인데 왜 경고음처럼 들렸을까?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1시간 전에 입원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중소기업이지만 꾸준히 월급의 60% 적금하고
퇴근해서 자격증 공부하다 보면 희망이 보이겠지 했는데
또 한 번 무너져야 하는구나..
"엄마가 무릎 연골이 아예 다 닳아서.. 무릎 수술하고 이참에 쌍꺼풀 수술도 한대.."
순간 별 생각을 다했다.
싸늘하게 사후경직된 아빠를 처음 발견했던 그날처럼
'뭐지? 수술하다 잘못되면 난 이제 부모가 아예 없는 사람이 되나?'
'20대 후반에 부모가 없는 건 한부모 가정처럼 사회적 복지제도도 없지 않나?'
'엄마 수술비 어떻게 마련하지?'
'엄마.. 갈 거면 나도 데려가'
무릎 수술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사망률이 높은 수술이 절대 아닐뿐더러
노화로 인한 쁘띠 쌍꺼풀 수술까지 기왕에 한다는 말에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게 원래 내 엄마지
하루 입원하는데도 책을 3권 빌려서 병실에서 읽는 사람
부동산 투자로 한탕해보려다가 실패해도 7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끊지 못하는 사람
아빠를 떠나보내고 1년 내내 우느라 눈꺼풀이 부어버렸다며 수술을 감행하는 사람
원래도 하나밖에 없지만, 아빠가 없으니 더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부모님
큰 수술이 아니라니 집에 도착해서 안심의 웃음과 알 수 없는 눈물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슬프고 억울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브런치만 봐도 커다란 시련 앞에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는 수많은 작가님들이 계시다.
브런치까지 가지 않아도 당장 옆집, 동네 슈퍼, 직장 동료 저마다 말 못 할 슬픔과 고민들이 있다.
비교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타인이 나보다 힘들다고 해서 안심하고 싶진 않다.
그건 좀.. 멋이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것 같다.
남편 없이, 집도 없이, 무릎 연골도 없이 힘든데도 다시 예쁘고 건강하게 살아보려 무릎 수술과 쌍꺼풀 수술을 동시에 진행하는 엄마.
만약 엄마가 떠난다면 국가에서 어떤 복지 혜택을 받아서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나.
어쨌든 우리 가족은 살아남았고 아주 조금 생활력이 강해졌다.
혹시 한 걸음만 더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까 봐
그래서 계속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나를 가장 슬프게 한 사람은 먼저 가버린 아빠이지만
내가 살아가야 할 믿음도 아빠에게 물려받았기에
오늘도 반지하 화장실 곰팡이를 열심히 없애고
빨래방에서 건조한 이불을 챙겨 와 이부자리를 펴고 잠 잘 준비를 했다.
아,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하나 더 할 일이 생각났다.
여기에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마시지 않았던 맥주캔을 꺼내서 이불 옆에 두었다.
축하주다
새로 시작하는 희망찬 내 인생을 위하여!
이제 아빠 꿈을 꾸고 일어나도 울지 않을 것이다.
아빠 얼굴을 봐서 좋았다고 로또나 사야겠다고 기쁜 마음으로 출근할 거니까.
오랜만에 마셔보는 맥주는 너무나도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