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한국인의 고유 기술 중에 하나는 "도와달라"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명 '우리가 남이가' 전략이랄까.
나는 서울토박이에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일본'에서 무려 15년을 일하다 온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인지 "도와달라"라고 말하는 게 참으로 어렵다.
내가 직접 "도와달라"는 말을 내뱉는 건, ‘나 똥 싸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줘’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만큼이나 민망하고 부끄럽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보면,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도움을 청한 이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에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보다 "여보, 이것 좀 옮기는 거 도와줘"라고 말하는 게 더 빨리 화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미안해"라고 하면 곧장 "뭐가 미안한데?"라는 반문이 돌아오지만,
"도와줘"라고 하면, '같이 하자, 우리는 한 팀이잖아'라는 무의식을 느껴서 "그래"라고 대답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걸 초등학교 1학년 때 은근히 알고 있었던 걸까?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날이면 안방 서재로 가서 급히 책을 골랐고,
부부싸움한 부모님에게 노무현(저) 『여보, 나 좀 도와줘』책을 건넸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이 부부싸움 이야기를 다루진 않았던 거 같지만?
아무튼 엄마 아빠가 서로 도우면서 그만 싸우길 바란다는 마음을 책 표지에 빌려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처세술로는 상대와 헤어졌을 때 "당신의 000한 장점 덕분에 내가 행복했어요"라고 말하기보다, "당신이 000 해줬기 때문에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게 좋다고 한다.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고… 그렇지만 우리는 헤어진다>라는 결론은, 인간의 뇌 구조상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사람인 나랑 왜 헤어지려는 거냐고 따지게 되는 문구라고 했다.
그래서 관객들이 '헤어질 결심'의 명대사로 많이 뽑는 구절이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가 아닐까?
상대방의 존재로 내가 무엇을 견딜 수 있었고, 어떤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며,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정확히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헤어지는 입장에선 서운하고 슬프겠지만 의미 있는 이별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기에.
별것 아닌 슬픔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으나,
내 몸의 주인으로서 말해보자면 올해 나의 몸 상태가 무척 안 좋아서인지 발랄한 마음을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반지하 집은 자꾸 곰팡이로 말썽이고, 사람들도 다 맘에 안 들고, 재테크는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고..
그래도 올해는 기록하기를 습관화하기로 한 을사년이 아닌가.
아플 때, 기쁠 때, 슬플 때, 의외로 땡잡았을 때.. 모든 것을 적어보았다.
오늘 왜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하지 않고 혼자 먹었는지
(이유: 기획팀 대리가 너무 쩝쩝거려서 > 내 선택: 가성비 있게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옴 > 결론: 돈도 굳고, 시간도 많이 남아서 남산 둘레길까지 걷고 왔다. 종종 집에서 점심 싸 오자!)
왜 한창 상승세인 이 종목을 팔았는지
(이유: 구독하는 브런치 경제 작가가 당분간 예의주시하라고 해서 > 내 선택: 차트도 안 보고 주변에서 곧 금리 인하 할 거라는 말에 미장 매도 해버림 > 결론: 15% 수익을 내긴 했지만, 내 목표 수익률도 아니었고 타인의 말만 듣고 매도하지는 말자!)
왜 이유 없는 출혈이 생겼는지
(이유: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서 > 내 선택: 철분 영양제를 사서 먹었다 > 결론: 병원에서도 딱히 큰 문제 아니라고 했으니 평소에 철분과 비타민을 잘 챙겨 먹자!)
등등
매일의 내 생각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보고 있었다.
왜 1시간 뛰고 와서 자기 전에 갑자기 울컥하는지
이 기록에 대해서는 이유, 선택, 결론 내리기 어렵지만..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아무래도 헤어질 때, 상대방의 존재로 내가 무엇을 견딜 수 있었고, 어떤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며,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정확히 말해주지 못한 게 아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추론해보고 있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완벽한 이별이 어디 있겠냐만, 아마도 이것이 가장 큰 ‘울컥’의 원인 아닐까.
여느 때처럼 집에 돌아왔는데 아빠가 쓰러져 있었다. 곧 경찰차와 구급차, 친척들이 몰려와 어떻게 된 거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날 내가 집을 비우지 않았다면, 아빠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들이 이어졌고, 나 또한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견디기 힘들었다.
아빠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엄마의 감정을 중재하던 사람이었으며, 그날 수업을 완벽히 마친 직후 쓰러진 스승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구도 ‘고마운 존재였다’는 말을 미처 건네지 못한 채 다급하게 이별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 같다.
내가 아빠라는 존재로 얼마나 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금수저보다 귀하다는 다정한 부모를 만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오늘 꿈에서 아낌없이 말하고 왔다.
어찌나 후련하던지!
우리는 남이 아니니까 "도와달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했다.
앞으로 날 잘 지켜봐 달라고, 내가 이렇게 힘들어 보이면 하늘에서 좀 도와주고 그러라고.
회사로 돌아가면 이 법칙을 아주 잘 사용해 봐야겠다.
조금 뻔뻔하게 부탁해도 괜찮을 것 같다.
"작가님, 제가 중소기업 출판사에서 일해서 계약금을 300 이상드리긴 어렵겠지만 작가님과 좋은 책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글을 보고 행동한 뒤로 제가 큰 손실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저만해도 이렇게 큰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작가님의 글이 책으로 나온다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손실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저 좀 도와주시죠"
"대표님, 제가 인쇄소 사장님과 네고하기엔 아직 경력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좋은 퀄리티로 책을 내고 싶은데 표지에 홀로그램박을 50 안에 맞추는 것좀 도와주시죠… "
집주인에게도 이렇게 말해야겠다.
"곰팡이 제거업체 한번 더 부르는 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입주 전에 한번 제거해 주셔서 반년정도 잘 때 창문 열고 편하게 잘 수 있었는데요.. 여름철이라 다시 또 곰팡이가 피다 보니 호흡기도 안 좋아지는 거 같고, 냄새 때문에 힘들기도 하네요.."
..
적고 나니 쪽팔리긴 하다..
그래도 진심이다.
근데 진짜 부끄럽긴 하네..
결국, 도움을 청하는 말은 나를 지키는 가장 솔직한 용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