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니 슬슬 인생 게임 후반부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이렇게 증상이 심한 경우는 처음 봐요. 이렇게 증상이 심한 경우는 처음 봐요.
연말이다!
죽을 뻔했는데 살아있는 연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있어서 기쁘다는 걸 느낀 연말.
12월이 되자마자 하늘이 고꾸라졌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뒤틀렸다.
출근하려고 땅에 다리를 딛는 순간, 오른쪽만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골반이 뒤뚱거렸다.
눈앞의 사람들은 붓으로 물감을 섞듯 빙글빙글 돌았다.
한 시간에 세 번씩 구토를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해도 안정되지 않아 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뇌 MRI를 찍어봐야 한단다.
처음엔 ‘이석증’으로 판단하려 했다지만, 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고 했다.
혹시 가족 중에 혈관 질환으로 아팠던 사람이 있었냐는 질문에, 아빠가 퍼뜩 떠올랐다.
그리워하다 못해 바로 아빠를 따라가는 건가
미인박명이라더니(아파서 뇌의 메타인지 능력도 소실).
담당의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고 오만가지의 생각이 스쳤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뇌질환 보험 안 들어놨는데'라니.
내 무의식 속에 죽음보다도 섬뜩한 게 돈인가 보다.
병원비도 걱정되고,
남편과 자식 모두 잃게 될 엄마도 안쓰럽고,
풋내기 편집자인 나를 믿고 원고를 쓰고 있는 작가들에게 메일도 보내야 하는데..
이틀 뒤에 자격증 시험도 있는데, 내가 퇴근 후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장 가다가 쓰러지면 어떡하지 별 생각을 다 껴안고 병원을 나왔다.
이석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했다.
수액과 주사를 맞아도 낫지 않는 걸 보니 뇌질환 같다고도 했다.
병명이라도 제대로 알면 마음이 편하련만
"희한하네요.. 희한해! 이렇게 증상이 심한 경우는 드물어서~"
의사의 아리송한 진단에 불안감은 커져만 가..
인생 난이도 높이는 퀘스트 받는 기분이다. 되레 즐기는 지경까지 갔다.
"그래. 뇌질환 판정 나오면 뭐 어때!
나쁜 짓 안 하고 살았으니 안 무섭다. 담당 작가 원고 교정보고, 이번 주 자격증 시험 합격한다."
두 번의 구역질 후에 치른 외국어 시험은 정말이지 (confusing), (ややこしい), (混乱的)
안 그래도 어려운데 눈앞까지 빙빙 도니, 모든 문제가 헷갈렸다.
그래도 언제나 정답은 [옳은 것을 하나 고르시오].
헷갈리는 건 틀리고,
명확한 것이 맞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답을 골랐고, 그 결과를 기다려본다.
일주일이 지나도 어지럼증이 가라앉지 않아 결국 뇌 MRI를 찍었다.
결과는 아주 건강함.
뇌혈관 이상 없음.
최종 병명은 ‘이석증’이다.
이석이 덩어리째 떨어지지 않고, 가장 안 좋은 세세한 형태로 떨어져 오래 어지러웠다고 했다.
의사도 헷갈렸지만 결국 답을 내려주었다.
나는 선택지가 많이 없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예전엔 여름 방학에 하와이를 갈지 오키나와를 갈지 고민했다면
지금은 가스비를 어떻게 아끼고 정부 지원금을 받을지 고민한다.
야근 없는 날엔 쿠팡이츠를 뛰거나
68% 수익 난 주식을 지금 팔지, 추매 할지 기록한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돈 없이 죽지 않기]가 나의 정답이라 골랐다.
살아남았으니 돈을 열심히 모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행동만 하겠다.
보험이 없어서 정말 뇌질환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석증’이라는 정답을 듣고 나니
더 살아도 좋겠다는 선택지도 보인다.
이 경우엔 [잘 살아보기]를 고를 것이다.
인생의 선택지가 대폭 줄어들어 슬픈 날도 있었지만
되레 마음은 편하다.
헷갈리는 선택지가 줄었기 때문이다.
킬러 문항을 만났다고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넘기고 풀 수 있는 문제부터 푼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시간이 남으면 다시 보거나 찍는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문제는 일단 넘겼다.
이제 다음 문제를 풀어나가야지.
오전 반차를 쓰고 들른 병원에서 끄적끄적 브런치 글을 남겨본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글은 오늘도 올라온다.
시험도 끝났으니 퇴근길에 여유롭게 읽어야지.
가장 올바르다고 믿는 것은 이런 일상이니까.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받고, 공부하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눈앞이 핑핑 도는 외국어 시험이 알려준 교훈!
그나저나 합격했겠지..?
내가 매우 잘했으면 좋겠다.
내 선택이 가장 올바른 것이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