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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30. 2022

코티솔~, 옥시토신!


순례자 길을 떠난 지 이튿날 아침, 아니 이른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아직 시차 적응을 못한 탓이기도 했지만 제 대각선 아래 침대에서 자는 사람이 내지르는 잠꼬대 소리에 중간중간 잠에서 깼습니다. 수면의학 시간에 배운 내용이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해독할 수 없는 언어가 쏟아져 나오다니, 신기하군. 아니 언어 이전의 언어인가? 괴성 사이사이로 다른 사람들이 코 고는 소리가 옅게 들려왔습니다. 그 속에서 잠꼬대하는 사람의 위층, 그러니까 제 옆 침대에서 나는 소리는 또렷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우, 노우~. “


6시가 되자 성령 충만한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성가는 저 자신이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임을 상기시켜 줬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런데 홀리한 기상 음악은 딱 한 곡으로 끝났습니다. 갑자기 헤비메탈 사운드가 나오더니 빨리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내뿜었습니다. 순례자들은 비몽사몽 침대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수도원에서 울려 퍼지는 헤비메탈 사운드를 따라 부르며 그대로 누워있었습니다.

어제 피레네를 넘으면서 발을 다쳐 오늘은 남들보다 절반 가량 걷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기상 음악으로 부족했는지 숙소 직원이 침대마다 다니면서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부에노스 디아스~(빨리 나가^^).‘


거의 마지막으로 숙소를 빠져나와 혼자 길을 찾다 하마터면 반대방향으로 걸을 뻔했습니다.

남들보다 적게 걷긴 해도 다음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10km를 걸어야 했습니다.

피레네 산기슭의 목가적인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제 앞에 두 명의 아들과 초로의 어머니가 걷고 있었습니다. 아들들은 이따금 멈춰 서서 풍경 사진을 찍으며 어머니 보조에 맞췄고 저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호젓한 숲과 두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순례자 외에 동네 주민은 보이지 않았고 문이 열려 있는 카페나 식당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 마을,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문 연 가게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잘못하면 낮잠 타임인 시에스타에 걸려 늦은 오후까지 쫄쫄 굶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식당 안은 사람들과 커다란 등산가방으로 북적였고 선반에는 작은 그릇에 담긴 신선한 요리가 가득했습니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활기차게 아침인사를 건네는 주인아저씨는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웨어 아유 프럼, 왓 이즈 유어 좝?!' 그 질문은 저에도 돌아왔습니다. 제 대답을 들은 주인아저씨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코티솔~~~~~~~~ 옥시토신!!!!!!!"


코티솔 부분에서 양손 엄지를 바닥으로 향하게 해 바운스 시켰고 옥시토신 부분에서 양손 엄지를 치켜들고 바운스 시켰습니다.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세로토닌, 도파민은 아는데 옥시토신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 예상대로 보통 아저씨가 아니었습니다. 아저씨가 소크라테스부터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불가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데 저는 제 뒤에 굶주린 순례자들이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주인아저씨의 부탁대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만한 책을 추천한 다음 저는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숙소가 있는 아기자기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아담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3층짜리 가정집이었습니다. 늦은 오후, 드문드문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지나가고 이내 마을은 텅 빈 것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 그 마을에 장례식이 있어 하나뿐인 슈퍼마켓과 식당은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손수 준비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시간, 억세게 운 좋은 7명의 순례자가 저녁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같이 여행 온 2명 빼고는 모두 초면이었습니다. 산티아고까지 총 800km를 걸어야 하는데 고작 10km를 걷고 하룻밤 쉬어간다면 분명 속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임에 분명했습니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서로의 이름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와인과 따뜻한 음식, 그리고 사람.

우리는 진짜 그릇이 깨질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었습니다. 오늘 순례자 길에서 가장 뒤처진 무리가 우리라며 ‘We are FAILURE!'라고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식당에서 철학 토론을 하던 애가 얘야!!"


다들 아까 봤던 장면을 떠올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 뒤로 지친 표정으로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긴 대화가 내키지 않았지만 열정 만수르인 아저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했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거기서 누군가 철학 토론하는 걸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어."


밤늦게 주방을 정리할 주인아주머니가 떠올라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무렵 다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박하게 꾸며진 방 안에서 그날 하루를 떠올렸습니다.

'순례자 길에서 옥시토신을 듣게 되다니.'

그때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산티아고 길 위에서 윗빠사나를 권하는 브라더를 만나게 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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