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후불제 인생I
인생 빚은 돈이 아니라 책임이다. 오래도록 빚 없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큰 사고도 없었고, 무모한 도박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큰 피해를 준 적도 거의 없었다. 하루하루 내 삶을 성심껏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심했다. 적어도 인생만큼은 구차하게 관리하고 있지 않다고.
인생 빚이 생기는 건,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로 찍히는 날만은 아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인생 빚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게로. 곰곰이 생각하면 신호는 있었다. 미뤄둔 선택들, 대충 넘긴 감정들, 언젠가 하겠다고만 말했던 다짐들.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여유 생기면, 이번은 넘기도 괜찮아질 거야.”
그 모든 미룸이, 사실은 인생에서 빌려 쓴 시간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나는 조금씩 삶을 빌려 쓰고 있었다. 책임은 회피하고 감정은 낭비했으며, 나에게 해야 할 설명을 뒤로 미뤘다. 이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붙고 있었다. 좋은 일은 물론이고, 불편한 일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자가 불어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삶이 무거워졌다.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조차 버거웠고, 아무 이유 없이 자주 지쳤다. 그때 깨달았다. 빚더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꼭 돈으로 갚아야 할 건 아니었다. 미뤄둔 선택의 대가, 외면한 감정의 잔액, 책임지지 못한 시간들이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사소했지만, 합산된 총액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인생의 빚은 그렇게 계산서를 들이밀었다. 한꺼번에.
하지만 나는 더 바쁘게 도망쳤다. 내가 생각해낸 탈출구였다.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도 했다. 하지만 인생 빚은 도망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체 이자처럼 마음을 갉아먹었다. 결국 멈추어 섰다. 빚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인정하기로 했다.
완벽함은 자산이 아니지만, 책임은 신용이다.
“그래, 나는 빚진 인생을 살고 있다. 완벽하지 않았고, 용감하지도 못했으며, 여러 번 피했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 순간, 마음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인생 빚은 한꺼번에 갚을 수 없다. 대신, 하루씩 상환할 수 있다. 미뤄둔 사과를 건네고, 외면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 하나를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게 나의 상환 방식이었다.
지금도 빚은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계산이 끝난 삶 위에 서 있다.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갚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책임질 기회를 남겨두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인생 빚더미는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생을 계산하며 살라고 왔는지도 모른다. 빚을 인정한 순간부터, 내 삶은 채무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된다.
나는 오늘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완벽하지 않지만, 도망치지도 않으며. 인생은 빚을 없애는 싸움이 아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행동이다. 오늘도 나는 상환 중이다.
※ 작가 소개: 기안장_브런치 작가, 2025년 항공문학상 우수상, 2024년 원주신문 올해의 오피니언상, 밀리의서재 올해의 밀리로드 Top 50, 문장21 시부문 신인문학상, 문학광장 수필부문 신인작가상 수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