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씨, 단 5분만이라도

I누가 행복한 사람인가I

by 작가 기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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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다. 돌아가신 엄마다.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를 불러오고 싶다. 그분은 내게 어떤 존재였을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줄곧 그분이 그리웠다.

엄마와의 중첩된 삶의 흔적이, 내 기억 속에서 엄청난 그리움으로 묻어났다.

애인을 그리워하는 것과는 달랐다. 애인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엄마는 그리움 자체가 크게 달아오르는 존재였다.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 자신의 삶 속에 숨겨놓은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고 싶은 소원이 담겨 있었다. 시인은 엄마! 하고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를 불러내고 싶었다. 어쩜 나하고 똑같은 심정이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엄마란 그런 존재다. 물씬 보고 싶은 그리움을 뿜어내는 대상이다. 단 5분이라도, 함께 무언가를 공감하며 나누고 싶은 그리움의 절정이다.

내가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리면, 늘 그 자리에는 엄마가 있었다.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였다. 엄마는 2년 전, 내 품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침을 드시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셨고, 나는 서재에서 책을 쓰고 있었다. 몸이 불편하고 치매를 앓던 아버지를 돌보는 문제로, 엄마는 다른 형제들과 통화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버지 일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미련스럽게 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책 작업에 몰두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거실에 앉아 있던 엄마는 그대로 쓰려졌다. 너무 놀라서 거실로 달려나갔고, 쓰러지신 엄마를 내 품에 안았다. 급하게 형제들과 통화하고 앰뷸런스를 불렀지만, 끝내 차가운 죽음의 강을 건넜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였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책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를 못하고, 홀로 그분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서울에서 지방 도시로 이사한 후, 나는 몇 년째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녔다.

함께 병원을 갈 때는 말끝마다‘영자씨’라며 엄마 이름을 부르며 장난치곤 했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갔다 오는 날이면, 허물없이 병원 근처의 중앙시장에서 놀기도 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유독 요란스러울 만큼 장난기가 발동했다.

가끔 엄마와 둘이서 놀던 시간을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영자씨, 미인 할매라서 저기 지나가는 할배가 자꾸 쳐다보는데...”


괜히 이런 말장난을 하면, 엄마는 “노망난 할배”라며 얼굴을 붉혔다. 엄마와 둘이 나누던 대화는 사소했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시장통을 구경하며 웃는 일들이 너무 좋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나는, 거리감도 허물도 없이 함께 어울려서 고추장도 담그고 김장도 했다.

그날도 무더위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병원을 갔다 오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엄마와 나는 원주 감영으로 놀러 갔다. 그곳은 조선시대 500년간 강원도의 행정과 군사, 문화를 관장하던 심장부였다. 원주 감영은 과거에 강원도의 수부 도시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강원도 관찰사가 머물던 건물은 물론, 인근 지역의 동학운동과 독립운동사, 기독교 탄압의 역사현장을 관람할 수 있는 유물, 자료 전시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엄마와 나는 전시실을 돌아본 후, 대청마루가 넓게 자리를 잡은 선화당 건물로 올라갔다. 한복을 입고 옛날 재판과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전통문화의 체험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둘이서 역사현장을 모방하며 상황극을 재현하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역사현장 속에서 머물러 있었다.


“영자씨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옛날 강원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앉아 있던 곳이에요. 사또라고 생각하고 이리 오너라~한 번 해보세요.”

“여기가 강원도지사가 앉아 있던 곳이 맞지?”

“예, 지금은 강원도지사죠. 그러니까 한 번 이리 오너라~해보세요.”


옆에서 치근덕거리던 아들의 요구를 못 이겼는지, 엄마는 내 장난기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리 오너라~”라며 수줍은 듯이 목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장난기가 발동해서 엄마에게 주문했다.


“영자씨, 목소리가 작아서 하인들이 들을 수 있겠어요. 좀 더 크게 해보세요.”


엄마는 내 부탁을 못 이긴 척, 제법 “이리 오너라”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예, 마님~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라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때 엄마는 다시 순발력 있게 상황극을 이어갔다.


“얼른 가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 갖고 오너라. 돈은 예 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신발을 신고 달려갔다. 그 순간은 모자母子가 아니라 친구였다. 엄마의 수줍은 듯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맴돌고, 그 장면은 내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작은 영화처럼 재생되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그분과의 추억을 들추어본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그분은 내게 행복 바이블과도 같았다. 어릴 때부터 행복했던 기억 속에는 늘 그분이 함께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웃음을 선물했다.

어느 날 정재찬 교수의 ‘부모’라는 글을 읽다가, 다시금 엄마를 생각했다.


“정말 정말 다시 만나 함께 살 수 있다면, 맛난 것, 입고픈 것, 가고픈 곳, 무엇이든 어디든, 부디 말씀만 하면 원 없이 다 들어드릴 텐데.”


엄마와 나 사이에는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는 것만으로 불평이나 투정도 없이 행복감이 꽃을 피운다. 그분을 생각하면, 행복의 지혜는 단순하다. 그날 그 상황에 맞게 아들과 함께 놀아주던 분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대목이 남아 있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좀 더 여유롭게 보살펴 드렸으면 하는 후회가 솟아오른다. 중년의 나이가 지나 책을 쓴다고 직장을 내려놓고, 작가의 길을 걷고 있던 내겐 엄청난 자책감이 몰려온다. 엄마와 더 많이 놀아드리지를 못했다.

신(神)이 내게 준 가장 소중한 존재는 엄마다. 엄마를 떠나보낸 후, 이런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자식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를 불러오고 싶다.

오늘 하루 단 몇 시간이라도, 그분과 둘이서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후회의 그림자 속에는 작은 위안도 있다. 엄마와 나는 도심 곳곳에서 함께 놀았으며, 함께 웃었다. 그 시간이 내 마음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일지도 모른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앞의 사람들과 기꺼이 웃고, 즐겁게 보내는 것, 그게 삶의 행복이란 걸 깨닫는다. 세대를 떠나 친구처럼 놀아주는 일이다.


그래 맞다. 천국에서 엄마를 불러올 수 있다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놀고 싶다. 서울에서 딸들이 엄마아빠를 찾아오면, 어김없이 장난을 치고 아빠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논다.

세대를 뛰어넘어, 손녀딸들도 함께 어울리고 장난치며 웃는 법을 엄마에게 배웠는가 보다. 지금, 단 5분만이라도 엄마를 불러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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