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간 인연이 남긴 빛

I패랭이꽃의 행복 감각들I

by 작가 기안장


수많은 얼굴이 스쳐 간다. 대도시의 아침, 우리는 매일 수천 개의 인연을 지나친다. 대부분은 이름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우연한 인연들 중에는 짧은 시간이라도 좋은 기억을 남긴다. 좋은 기억은 마음에 오래 남고 깊은 울림이 있다. 어떤 만남은 바람처럼 스쳐 가고, 어떤 만남은 오래 곁을 지키며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강물처럼 흘러와 마음을 적시며, 삶의 위로가 될 때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나는 우연한 인연을 떠올릴 때마다 한 장면이 기억난다. 대학생이었던 사월의 봄날,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중년 남자의 말 한마디가 평생 마음에 남았다.

낯선 만남이었다. 이런 인연은 바람처럼 스쳐 왔지만,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름조차 모르지만, 그와의 대화는 평생 잊지 못할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았다.

무심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나눈 짧은 대화였다. 대학을 떠나 사회생활을 할 동안에도 그의 조언은 늘 가슴속에 잔잔하게 고여 있었다. 길가에서 스친 말 하나가 내 삶의 좌우명이 될 줄은 몰랐다. 늘 최선을 다하려는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었다.

좌우명(座右銘)은 늘 곁에 두고 생각과 행동을 붙잡는 글귀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가 많아요. 현재는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방황의 시작도 끝도, 늘 현재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해요.”


내가 대학생인 줄 알고, 낯선 중년 남자가 건넨 말이었다. 그 시절의 대학생들은,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세대였다.

그때 들은 그의 말은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그의 인생 조언은 시대적인 아픔보다는 “늘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라는 인생 모토(motto)를 새겨 놓았다. 과거와 미래의 삶 속에 빠져 후회와 불안감에 휩싸이지 말고, 주어진 현실 앞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이었다.

최선이란 완벽함이 아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매 순간 성실함이 모여 내일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삶의 의지다.

내 삶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직선행 고속버스를 타고 달렸다. 물론 대학 생활은 학창시절 걸어갔던 길들, 도서관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순간들, 별빛 아래에서 나눈 사랑의 대화들,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모든 것이 흘러간 과거의 기억일지라도, 여전히 그분의 말은 내 안에서 빛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되었다.

짧은 순간이라도, 사람과의 만남은 기쁨과 슬픔, 웃음과 위로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한순간 기억의 늪이 아니라, 내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겨놓기도 한다. 짧게 스쳐 가도, 오래 함께 머물러도 모두 감정과 기억 속에 새겨지는 강도는 다르다. 한 번의 대화, 한 통의 편지, 한 번의 눈빛에도 기억을 풍요롭게 한다.

만약 애틋한 만남 한 번 없었다면, 내 삶은 차가운 눈빛만 냉각수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결국, 삶은 거대한 강물처럼 세월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가고, 어떤 이는 곁에 남지만, 어떤 이는 멀리 떠나간다.

그러나 강물은 언젠가 마음의 바다로 모인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만남은 어쩌면 늘 마음 속의 기억 위에서 다시 피어날지도 모른다.

설령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좋은 인연이 있었기에 지금 내 삶의 동력이 되었고, 그 삶은 조금 더 사랑으로 빛날 수 있었을 테니까. 앞으로도 또 다른 사람들과도 우연한 만남은 계속될 것이다. 그 자체가 작은 운명이다.

스쳐 간 사람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되었다. 그 인연들이, 내 삶을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래서 늘 고마운 마음이 차오른다.

어제도 오늘도, 우연히 스쳐 간 사람들이 내 마음의 강물을 흐르게 한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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