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양자점프에게 과거를 캐묻는 별먼지

우린 대체 어디서 왔니?

by 양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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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엉뚱한 질문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과학자이면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천국을 어떻게 상상할까? 몸이 원자로 다 쪼개진다는데, 그러면 원자들이 천국에 가는 거야?" 아이의 물음은 소파에 누워 던진 말처럼 가벼웠지만,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묻는 묵직한 질문이었다.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이왕이면 천국이 낫다. 갈 확률이 0.00001%로 희박하더라도 일단 보험은 들어놓아야 마음이 한결 편하다. 사후에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르니, 종교를 갖고 기도를 올리는 건 일종의 사후세계 업그레이드 확률을 높이기 위한 귀여운 안간힘과 같다.

그런데 깐깐한 과학자들은 우리가 죽어봤자 그저 한 줌의 '별먼지(원자)'로 흩어진다고 하며 초를 친다. 그렇다면 과학자면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도대체 이 차가운 별먼지와 따뜻한 천국이라는 기막힌 모순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버무려서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걸까. 내 몸을 이루던 수많은 원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다음, 각자 천국행 티켓을 끊고 단체로 열차처럼 천국에 가는 그림일까.

게다가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왜 굳이 '진화'라는 지독하게 번거롭고 랜덤한 방법을 택했을까? 완벽한 설계도가 있다면 짠!하고 단숨에 완성품을 뽑아내면 그만일 텐데,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남겠다고 하는 피 터지는 진화의 과정을 겪게 하다니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이고 기묘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이 모순적인 종교와 과학의 딜레마를 아주 유쾌하게 답한 사람이 있다. 빅뱅 이론의 토대가 된 '원시 원자설'을 제안한 과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였던 조르주 르메트르다. 그는 과학적 팩트와 종교적 믿음이 절대 충돌하지 않으며, 아주 평화롭게 나란히 병행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어느 날 조카가 그에게 "삼촌, 우주의 시작이라는 그 '원시 원자'는 대체 어디서 온 거예요?"라고 짓궂게 물었다. 르메트르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아, 그거? 원시 원자가 바로 하느님이었어."

한술 더 떠서, 르메트르는 우주의 기원을 논할 때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인과율 따위는 쿨하게 건너뛰어 버렸다. 대신 태초의 허공에서 튀어 오른 우주적 돌발 행동 '양자 점프(Quantum Jump)'를 우주의 시작으로 지목했다. 강연중에 그는 “신이 빅뱅을 방해했을리 없다.“며 원시원자설을 종교나 철학이 아닌 과학적 문제로 간주했고 모든 것은 천문 관측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우주가 정해진 매뉴얼대로 굴러가는 지루한 기계가 아니라 이토록 통제 불능의 창조적인 우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건, 애초에 그 첫 단추부터가 이 짜릿한 '묻지마 양자 점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우주는 뚝딱 만들어진 완제품 자판기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날 수 있도록 팽창 속도를 조절하며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망설이는 우주'였다. 참으로 인간적인 우주 아닌가. 르메트르의 이 빛나는 통찰은 훗날 우주와 생명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게 될 다음 세대 물리학자들에게 강력한 밑밥이자 영감이 되었다.

스크린샷 2026-03-31 074308.png (좌)조르주 르메트르가 보라색 노트에 남긴 ‘망설이는 우주’의 스케치. 원시원자(atom)에서 태어난 우주는 구불구불한 팽창곡선을 그리며 생명친화적인 환경으로 진화한다.

: atom =>우주 배경 복사(cosmic radiation), 가스 구름(gaseous clouds)=>원시 은하(protogalaxy)=>별(stars)


그리고 여기, 평생 휠체어에 앉아 우주의 끝장을 보려 했던 천재 스티븐 호킹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쓴 책에서 빅뱅 깊은 곳에 숨겨진 수학을 통해 물리적 우주를 대체할 최종이론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책은 전 세계적으로 무려 2,500만 부나 팔려나갔다. 그런데 말년에 그는 자기 "내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틀렸다"며 자신의 역작 『시간의 역사』가 "잘못된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며 극적인 셀프 디스를 날렸다. 우주 밖 VIP석에 앉아 만물을 굽어보는 오만한 신의 시선 ‘아르키메데스의 관점’을 버리고, 우주 안을 기어 다니는 '벌레의 시선'으로 돌아가자며 "이제 신 놀음은 그만 둘 때가 됐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깨달음은 꽤나 반전이다. 우리는 중력이나 전자기력 같은 '물리 법칙'이 태초부터 영원불변하게 세팅된 완벽한 매뉴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물리 법칙조차 우주가 팽창하고 냉각되며 생물처럼 스스로를 진화하고 창발(자기 조직화)해 낸 ‘생존 습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차가운 물리학의 안방에 다윈의 진화론이 문을 박차고 등판한 이른바 '물리 법칙의 진화', 즉 다윈주의적 우주론이다.
그는 동네방네 유행처럼 번진 '다중우주론'을 향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건, 무한하게 찍어낸 우주들 중 하나에 어쩌다 운 좋게 당첨됐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해 호킹은 "그건 과학적 예측을 포기한 비겁한 도피처"라며 고개를 저었다. 무한한 우주들 중 하나에 '뽀록으로 낙점된 존재'라는 자기소개는, 그에게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대신 그가 꺼내 든 카드는 '하향식 우주론'이었다. 우주 밖에서 로또 추첨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우주 안에 꼬물거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역으로 우주의 역사를 직조해낸다는 발상이다. 보통은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고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호킹의 양자 우주론은 이를 시원하게 뒤집어버린다.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의 말을 빌리자면 "질문이 없으면, 과거도 없다." 우주 한구석에 처박혀 꼬물거리는 미물 같은 관찰자인 우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린 대체 어디서 왔지?"라고 묻는 바로 그 순간, 미결정 상태로 둥둥 떠다니던 우주의 과거 역사가 덜컥 실체로 결정돼버린다는 것이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우주는 무려 138억 년 동안 온갖 뻘짓과 진화를 거쳐 기껏 '우리'라는 말많고 호기심 넘치는 지능적인 별먼지를 뭉쳐냈다. 왜? 우주 스스로 자기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기어이 우리 입을 빌려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말이다. 우주가 우리를 창조했지만, 동시에 폭풍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셈이다. 기막힌 상부상조 시스템이다.

결국 호킹은 세상을 떠난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아이작 뉴턴과 찰스 다윈 무덤 사이에 안치되었다. 엄밀한 수학과 지독한 진화론 사이, 딱 중간에 누운 셈이니 이보다 완벽한 자리 배치가 어딨을까. 그는 생의 대부분을 몸속에 갇힌 채 살았으나,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우리가 느끼는 경계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며 우주로 시크한 작별 메시지를 띄워 보낸 그는, 다가올 미래를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그러니 우리가 수명을 다하고 죽어 무의미한 재활용 먼지로 흩어진다 한들 뭐 어떤가. 별먼지 뭉치에 불과한 우리가 이 거대하고 쓸쓸한 우주를 향해 기어이 맹랑한 질문을 던졌고, 그 순간 우리는 ‘구경꾼’ 신분을 벗어나 무한한 우주의 역사를 의미 있게 채워 버린 '공동 창조자'가 되었다. 질문 하나로 계정이 초기화되어 이제는 우주의 관리자로 다시 로그인하는 셈이다. 결국 우주에 의미와 과거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사후세계의 확률을 계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린 어디서 왔지?"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우주의 역사 한 줄을 써내려가고 있다.



엔딩크레딧. 스티븐 호킹의 온도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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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I cannot move and I have to speak through a computer, in my mind I am free.”

(비록 내가 움직일 수도 없고, 컴퓨터를 통해야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서 나는 자유롭다.)


감각을 잃은 몸으로 포기하지 않고 공식을 써내려간 호킹 박사님께..

우주라는 경이로운 여행을 안내해주셔서 그리고 차갑게 언 줄만 알았던 블랙홀에도 온도가 있음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전합니다.


고전적인 블랙홀은 모든 것을 삼키기만 하는 차갑고 죽은 존재였다. 그러나 1974년, 호킹 박사는 양자역학을 블랙홀에 적용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부근에서 발생하는 '양자 요동' 때문에, 블랙홀이 에너지를 방출하며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호킹 복사며, 이 복사가 있기에 블랙홀은 고유한 '온도'를 갖게 된다. 호킹 박사의 묘비에도 새겨진 이 공식은 현대 물리학의 서로 다른 세 가지 기둥을 하나로 묶는 조화를 보여준다.

스크린샷 2026-04-01 072504.png 블랙홀의 온도 공식

- 상대성 이론 (G,c): 거대한 중력과 빛의 속도를 상징한다.

- 양자역학 (h): 미시 세계의 입자들이 부리는 마법을 담고 있다.

- 열역학 (K): 열과 온도의 흐름을 설명하는 볼츠만 상수가 들어있다.

이 짧은 식 안에 거시 우주(상대론)와 미시 우주(양자론), 그리고 생명의 따스함(열역학)이 공존하고 있다. 블랙홀이라는 파괴의 상징이 이 공식을 통해 우주의 품 안에 따스하게 녹아들었다.

호킹 온도의 가장 기묘한 점은 분모에 자리 잡은 질량(M)이다. 보통의 물체는 질량이 클수록 더 많은 열을 품지만, 블랙홀은 그 반대다. 질량이 작아질수록 온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증발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작은 블랙홀은 그 어떤 태양보다도 뜨겁게 타오르며, 눈부신 섬광과 함께 우주 속으로 자신의 흔적을 흩뿌린다. 호킹 박사가 발견한 이 온도는 곧 "우주에 완벽하게 닫힌 감옥은 없다"는 선언이다. 블랙홀에 갇힌 정보조차 온도의 흐름(복사)을 타고 밖으로 배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잃어버린 정보가 복원될 수 있다는 희망의 첫 단추가 바로 이 온도 공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이 뜨거운 공식은...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진실은 온기를 띠고 있으며, 그 온기를 따라 걷는 한 우리는 우주의 지평선 너머의 자유를 꿈꿀 수 있다고 속삭여 주는 듯하다.



<참고자료>

토마스 헤르토흐 저 <시간의 기원> 도판3. 르메트르의 메모

137p, 146~147p, 432 ~435p, 444~445p

묘비석 사진 Stephen Hawking service: David Walliams and N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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