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지점에서강사가 수신호를 보내고 BGM이 흐른다. 누군가 앞서서 길을 튼다. 하나 둘, 하나 둘......, 화면 속에서 보았던 모델들의 워킹을 떠올리며 무릎을 약간 더 높이 드는 순간 일자 걸음이 풀리고 휘청한다. 모퉁이를 돌아서 정면에 있는 거울과 마주한다. 거울 속에 나는 다른 사람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모델 같았다. 드디어 끝 지점, 턴을 해야 한다. 천천히 여유 있게를 외치던 목소리를 기억해 내는데 다시 헷갈리며 ‘뭘 어떻게?’ 하는 마음으로’ 발 끝을 내려다본다.
전방주시와 배에 힘을 주고 가슴 펴기, 동시에 상체에 힘을 빼라. 걸음을 처음 배우듯이 속으로 번호를 세어가며 의식적으로 걷는다. 스스로에게 걸었던 주문들이 하나씩 몸을 감다가 풀려 나가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걷기가 끝이 났다.
“여러분, 이리 오세요.” 강사가 여럿 앞에서 내 신발을 가리켰다. "지금 굽이 하나도 없는 플랫을 신으셨는데 3센티만 높아져도 걸음걸이가 정말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 그 말이었구나!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선배들이 내미는 워킹화를 신어 본다. 8센티 힐에 앞굽도 높아서 동그랗고 높다. 아찔한 뒷굽에 앞굽도 높여서 발끝에 무게가 집중되는 것을 분산해 준다. 모양이 유난히 동그랗고 높은 것은, 앞굽과 뒷굽이 높은 데다 운두라고 부르는 신발의 높이 마감선이 복숭아뼈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대상 탐색을 끝내고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는 내게 선배 모델들은 결연하게 주먹을 꼭 쥐어 보인다. 이 정도 신고는 날아서 다니는 수준이라고.
그럼에도 나는 밤 늦게까지 결정을 보류하고 쇼핑주문창 앞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개인의 취향은 8센티에 발목을 칭칭 감은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데 하얀 샌들이라니!
화단 풀숲에서 가을벌레들이 운다. 기온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오고 가게 한다. 실내에 있으면 가끔은 땀이 베어 나기도 하지만 이 서늘해지는 감각은 점차 냉기로 바뀌어 갈 것이다. 변화는 자연스럽고도 강력하다. 내 안에서도 변화와 저항이 교차하며 더 좋은 선택을 저울질한다. 플랫을 고집할 것인가? 글래디에이터를 받아 들일것인가? 단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뿐 답은 이미 정해졌다.